-숙의의학 소설-
박완서 『창밖은 봄』을 각색해 만든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30년도 훨씬 넘긴 기억이라 전체 서사는 가물가물하다.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 한 대목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굴뚝이나 하수도 따위를 고쳐주며 살아가는 남자와 식모살이하며 살아가는 여자가 어렵사리 만나 부부 연을 맺었다. 신산한 삶 틈바구니에 재수 좋은 한 날이 끼어들었다. 그래봐야 푼돈이지만 남자에게 여느 날보다 많은 돈이 생겼다. 남자는 생선 한 손을 사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들어선다. 여자는 함박웃음 지으며 반색하다가 이내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여자가 (정확히 똑같지는 않지만 같은 내용으로) 이렇게 말한다.
“겁이 나요. 우리 이렇게 잘살아도 되는 거예요?”
생선 한 손이 겁날 정도 행복이라는 저 야트막한 기본값. 듣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목이 메여 왔다.
우울장애 가운데 서구정신의학 눈에는 포착되지 않는 유형이 있다. 보통 사람과 비교해 행복 기본값이 현저히 낮은 사람들이 전 생애에 걸쳐 부단히 자기 행복감을 착취당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다. 착취자는 그들을 두 부류로 갈라쳐 무력하게 만든다. 한쪽은 착한, 겸손한, 사심 없는, 헌신적인,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칭찬한다. 다른 한쪽은 나약한, 게으른, 쓸모없는, 사회에 짐이나 되는 물건이라 질시한다. 그들은 그렇게 서서히 가라앉는다. 아무도 그들을 우울장애라 하지 않는다. 스스로도 그냥 그리 사는 것에 맞추어 간다.
바로 이 유형을 나는 ‘인생 기조로 자리 잡은 우울장애’라고 부른다. 물론 겪는 개인을 중심으로 명명했다. 큰 맥락에서 보면 ‘지배체제가 기획하는 정치경제학적 우울장애’ 정도로 명명할 수 있겠다. 아프고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뭐 달리 길이 없지 않냐, 는 그들 현실 수용은 다만 개인 체념이 아니다. 사회적 억압이기도 하다. 이런 비대칭 대칭을 알면서도 개인 차원에서나 아픈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는 치료자에게 이 문제는 늘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안겨준다.
한쪽은 심각한 알코올중독이고 다른 한쪽은 평생 철부지로 살아가는, 그마저 이혼한 부부를 부모로 둔 ㄹㅇ이 다소 초점을 잃은 눈빛으로 찾아왔다. 불안감과 우울감이 결합해 여간 단단해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그에게서 나타난 불안 지수는 내가 본 수치 가운데 가장 높았다. 발작과 자해 양상은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가족 가운데 누구 하나 이런 상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끊임없이 뭔가를 요구하고 불평했다. 그 위중한 상태는 정신뿐만이 아니었다. 몸도 직업도 연애도 미래도 한결같은 불안감과 우울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더욱더 안타깝게도 모든 어둠에 그 자신 스스로 이상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뭐라 딱히 묘사하기 어려운 소외가 그와 문제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명료하게 자기 문제를 알아차리고 단도직입으로 다가가는 기미가 거의 전혀 없었다. 아프고 힘들다는 감각과 기쁘고 즐겁게 살아야겠다는 애착이 맞물리지 않아 둔하고 모호하게 움직였다. 주고받는 대화도, 사려 깊은 강의도 속 깊게 끌어안지 못했다. 첫날과 넷째 날과 여덟째 날 거리가 모두 같았다! 낮디낮은 행복 기본값이 육중하게 그 영혼을 찍어 누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어느 날, 그가 전화해 상담 예약을 한 주 뒤로 미루었다. 공감했다. 다음 주에는, 시간이 되면 연락하겠다고 했다. 이해했다. 결국,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받아들였다. 그러면 아뜩한 저 바닥에 웅크린 채 뭐라 웅얼거리는 그 환영이 떠오르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