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의의학 소설-
한 초로의 남자 사람과 불면증 (그리고, 본인은 부정했지만, 뿌리 깊은 불안) 때문에 숙의했습니다. 숙의하는 동안 그는 제게 이 숙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교묘한 방식으로 보냈습니다. 늘 이런 식이었을 터이므로 차후 지속해서 치료받을 다른 의료인이 없음도 분명했습니다. 저는 사태를 직감하고 치료비를 받지 않겠다고 명토 박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상담받은 만큼 상응하는 치료비를 내고 가야 마음이 편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시는 대로 받겠다고 하고 직원에게 그리 일렀습니다. 나중에 확인한바, 아뿔싸, 5천 원을 주었다고 합니다! 빅터 프랭클 내용으로 훈수할 만큼 지적 수준이 있었던 그이기에 제가 받은 충격은 작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 대학병원 들렀다 오는 길인데, 의사가 30초가량 말하고 바로 처방을 내렸다면서 너무 성의 없어 이리 왔다고 했습니다. 30초 무성의를 질타하는 마음과 2시간가량 숙의한 후 5천 원을 내미는 마음이 과연 하나의 결일까,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분명 모독인데 그에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날 이후, 제법 긴 시간 동안 저는 참담한 심경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같은 시간 동안 숙의하고 나서 대단히 고맙다며, 이것밖에 안 받느냐며, 10만 원에 5만 원을 더 얹어주고 가신 어떤 중년 여자 사람에게는 그러면 제가 사기를 쳤을까요? 적어도 이 5천 원이 두 시간 치료비로 합당하다면 말입니다.
심란하고 일 안 풀릴 때 찾아가서 역술인에게 내는 ‘상담료’를 생각한다면-6년 동안 대학 교육받고 국가고시를 통과한 일이 신내림보다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의료인에게 2시간가량 숙의치료 받고 5천 원을 건네는 상황은 아무리 보아도 사회통념에서조차 벗어나 있는 풍경이 아닐까요? 예. 좋습니다. 제가 받은 대우가 그럴만하다고 받아들이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실은 그 5천 원이 제게 내린 평가만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즉 그 자신에 대한 평가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 자신이 고작 5천 원짜리 숙의치료를 선택해서 2시간가량을 허비해버렸으니까요. 저를 우스갯거리로 만듦으로써 결국 자신을 모독했다는 처연한 사실. 이점을 헤아리지 못한 모양입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숙의치료를 업신여기는 것일까요? 말에 대한 근본 관념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양에서 말은 내 남을 구별하고 쌍무적 계약을 맺는 공공 수단으로 인식됩니다. 말이 곧 기회요 권력이요 돈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나긴 과정에서 합리적 시민사회가 성립했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에게 말은 서로 연속성을 확인하고 경계를 허무는 사적 수단으로 인식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말 가치를 침묵 아래 두는 고답적 흐름이 자리 잡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말을 막 하는 비속한 흐름이 자리 잡았습니다. 극단적 분열이지요. 말을 통해 사회관계를 조절하고 병을 고친다는 개념에 취약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동력은 두 가지입니다. 그중 하나가 남이 나를 인정해주는 힘입니다. 어찌 보면 사람 한평생이 남한테 인정받으려 애쓰는 과정이 아닐까 합니다. 특히 마음이 병들어 고통당하고 있을 때, 내 고통에 귀 기울여 알아차리고 인정해주는 남이 건네는 힘이란 실로 감동적인 무엇입니다. 이것이 바로 숙의치료가 지닌 눈부신 가치입니다. 글쓰기에 치유 힘이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 점에서 숙의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약 따위로는 애당초 접근조차 안 되는 부분입니다. 요컨대 숙의 힘은 곧 경청 힘이요, 경청 힘은 곧 인정 힘입니다. 그 힘으로 아픔을 딛고 일어섭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또 하나 힘은 바로 스스로 인정하는 힘입니다. 남이 아무리 자신을 인정해주어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면 그만입니다. 허무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상처를 지닌 사람은 스스로 인정하는 힘이 약하거나 깨어져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숙의치료를 통해 남한테 인정받는 순간, 그렇게 인정받는 자신을 가치 있고 아름다운 존재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마른 펌프에 마중물을 부으면 물이 쏟아져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결국 내 인정조차도 남 인정에서 도움을 받으니 숙의치료란 참으로 기막힌 연금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숙의치료 연금술은 바로 다음부터 그 진면모를 드러냅니다. 인정 문제를 넘어서, 생존 동력 문제를 넘어서, 직접 치료가 일어납니다. 마음 아픈 사람 그 아픔이 치료자에게 흘러들어 ‘감염’됨으로써 공유되고 공유됨으로써 풀어집니다. 자기 아픔을 남에게 흘려 ‘감염’시키는 사람이 그 고소하고 달짝지근한 행복감(!)을 스스로 느끼느냐, 여부와 상관없이 치료는 이미 엄연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아픔만 ‘감염’되지 않습니다. 아픔을 지닌, 아픔보다 큰, 그 아픈 사람 가치와 아름다움도 ‘감염’됩니다. 동시에 반대로 치료자 생명력과 인격도 마음 아픈 사람에게 흘러들어 ‘감염’됩니다. ‘감염’을 주고받으며 치료자와 마음 아픈 사람은 치료와 삶을 연대합니다. 이 연대 무한 연쇄를 꿈꾸는 시공에 숙의치료는 빛나는 미학을 창조합니다.
이런 사실에 터 해 말한다면 숙의야말로 근원적 인간 조건입니다. 모든 존재는 비대칭 대칭구조 안에 있고, 그 비대칭 대칭을 자발적으로 깨뜨리는 운동으로서 생명 현상 한가운데 인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명인 한 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