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초록뚜껑 제주막걸리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따뜻한 국물요리가 생각났다. 오래간만에 들른 하나로마트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보니 고운 검은빛을 내는 실한 홍합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오늘은 홍합탕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홍합 한 팩이면 충분했지만, 부쩍 큰 요즘은 막둥이까지 제법 어른스러운 입맛을 가지고 있어 재료를 넉넉히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두 팩을 집어 들었다.
마늘도 집에 있고, 대파도 있고, 배추도 있다. 막걸리만 사면 된다.
주류 코너에서 막걸리를 살폈다. 오, 못 보던 거네. 새로 나왔나 보다. 한참을 구경하다 결국 내 손에 들린 건 역시 ‘제주막걸리’다. 오늘은 초록색 뚜껑. 편의점에는 흰 뚜껑만 판다. 흰 뚜껑은 수입쌀, 초록 뚜껑은 국산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입맛에는 초록 뚜껑이 조금 더 깊고 진한 맛이다.
집에 돌아와 커다란 김치통에 홍합을 넣고 소금을 한 움큼 집어 물을 가득 채웠다. 검은 비닐봉지로 김치통을 감싸 냉장고에 넣었다. 충분히 해감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졌다. 홍합은 오래 익히면 질겨지기에 먹기 직전에 끓여 은근한 불로 데우며 먹는 걸 선호한다.
해감해 둔 홍합을 꺼내 흐르는 물에 헹구고 껍데기에 붙은 이물질과 수염을 정리했다. 한 번 세척해서 나온 건지 손질이 수월했다.
커다란 냄비에 홍합을 담고 잠길 만큼 물을 부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냉동실에서 꺼낸 다진 마늘 한 스푼, 언제 사두었는지 기억도 가물한 한라산 소주를 쪼르르 부었다. 마늘과 소주가 잡내를 잡아주겠지.
냉장고에서 시어머니께서 직접 키우신 배추를 꺼내 쫑쫑 썰고 대파도 함께 썰었다.
“얘들아, 너희 고추 써도 돼?”
아이들이 거실에서 키우는 고추 화분에서 아기 고추 하나를 똑 꺾어 썰었다. 제법 고추 향이 풍긴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을 몸소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냄비가 부르르 끓기 시작했다. 뚜껑을 얼른 열어 거품을 걷어내고 배추와 대파, 고추를 넣었다.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충분하다. 홍합탕의 매력은 별다른 재료 없이도 깊은 맛을 낸다는 데 있다. 요리는 여기서 끝이다.
아이들이 밑반찬과 식기를 준비해 둔 식탁 위에 전기 플레이트를 올리고 냄비를 옮겼다. 입을 쩍쩍 벌린 홍합 껍데기 사이로 통통한 주황색 살이 보였다.
남편이 먼저 홍합 하나를 들어 초고추장을 살짝 찍어 먹었다.
“뭐야? 왜 이렇게 달아? 지금까지 먹은 홍합 중에 역대급인데?”
호들갑을 떤다.
“엄마, 진짜예요. 진짜 달아요.”
큰아이도 한 입 먹고는 국물까지 들이켰다.
“아빠, 국물도 맛있어요. 얼른 드셔 보세요.”
부녀의 쩝쩝박사 호흡이 제법이다.
막둥이는 “언니, 국물은 이렇게 먹는 거야.” 하며 홍합 껍데기로 국물을 떠 마신다. 어패류를 썩 좋아하지 않는 둘째도 “이 정도면 먹을 수 있겠어요.”라며 접시에 올려둔 홍합을 하나둘 집어 먹는다.
따뜻한 홍합에 시원한 막걸리 한 모금. 새콤한 초고추장이 홍합의 달큰함을 더 끌어내고, 막걸리는 그 모든 맛을 하나로 묶어준다. 입안이 순식간에 버라이어티 해졌다. 어느새 껍데기는 수북이 쌓이고 냄비는 텅 비었다.
아쉬웠다. 장 볼 때 칼국수 사리라도 사 올 걸. 이 진한 국물에 칼국수면이라면 분명 훌륭했을 텐데. 라면 사리를 넣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우리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지금이 너무 맛있다. 칼국수를 원하지만, 라면으로는 이 기분을 만족시킬 수 없다.’
홍합탕과 칼국수의 조합은 다음을 기약하며…….
불 위에서 은근히 따뜻함을 유지하는 국물처럼, 끓을수록 더 깊어지는 국물처럼 우리 가족의 사랑도 그러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