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막걸리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등교한 뒤, 나는 저녁 준비를 하려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오늘의 메뉴는 고등어조림. 미리 만들어 두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 양념이 속까지 푹 스며들테니 그 생각만으로도 흐뭇했다.
먼저 냉동실에서 고등어 필렛을 꺼냈다. 예전엔 내장만 손질된 고등어를 통째로 썰어 조림을 만들었지만, 남편이 한 번 생선가시가 목에 박혀 응급실을 전전한 뒤로는 가능하면 필렛만 산다. 고등어를 살펴보니, 이런. 지느러미 근처에 검은 막이 남아 있었다. 비린내를 덜려면 이걸 제거해야 한다. 행주를 들어 살살 벗겨내고 가볍게 헹군 뒤 삼등분으로 나누었다.
이번엔 냉장고에서 무를 꺼냈다. 어머니가 텃밭에서 직접 뽑아오신 무는 크진 않았지만 연둣빛이 참 곱다. 반으로 툭 잘라 표면의 흙을 씻어내고 잔뿌리를 다듬은 다음 큼직하게 썰어 냄비 바닥에 깔았다. 그 위에 손질한 고등어를 가지런히 올렸다.
이제 양념장을 만들 차례. 다시 냉장고 문을 열어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을 꺼내고, 냉동실에서 얼린 다진 마늘과 어머니표 생강청도 꺼냈다. 생강즙에 설탕을 섞어 오래 졸여 만든 생강청은 몸이 으슬할 때 차로 마셔도 좋고, 요리할 때 넣어도 향이 깊다. 깨끗이 씻어 둔 유리병에 고추장, 고춧가루, 간장, 다진마늘, 생강청, 올리고당을 적당히 넣고 후추를 톡 뿌려 마무리했다. 넉넉하게 만든 양념장은 앞으로도 우리 집 조림 요리에서 활약할 예정이다. 빨갛게 빛나는 양념을 고등어 위에 살살 펴 바르고 물을 자작하게 부은 뒤 가스불을 켰다.
부엌을 정리할 시간이다. 양념통은 제자리를 찾아가고, 사용한 도구들은 애벌설거지를 마친 뒤 식기세척기로 들어갔다. 뭔가 빠진 느낌이 들어 부엌을 휘리릭 둘러봤다. 아차, 양파를 깜빡했다. 양파를 탁탁 썰고, 냉동실에 미리 썰어둔 대파도 함께 꺼내 준비해 두었다.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는 냄비를 투명한 뚜껑 사이로 들여다보니, 붉은 거품들이 부지런히 피어올랐다가 터지길 반복한다. 불을 중불로 줄이고 국물이 졸아들기를 기다렸다. 청소기를 한 바퀴 돌린 뒤 다시 냄비를 열어보니 제법 향이 그럴싸하다. 준비해 둔 양파와 파를 넣고 뚜껑을 덮은 채 불을 껐다. 둘째가 좋아하는 양파는 남은 열기로 천천히 익어갈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이 돌아올 때까지 고등어와 무 깊은 곳까지 양념이 스며들겠지.
“오~ 엄마! 오늘 고등어조림이죠? 냄새 진짜 좋아요!”
어느새 학교에서 돌아온 큰아이가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그 말에 나도 벌써 기분이 좋아졌다.
“이따가 아빠랑 동생들 오면 같이 먹자. 국물이 아주 잘됐더라.”
식구들이 다 모인 저녁시간, 밑반찬을 꺼내고 고등어조림을 큰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렸더니, 가족들이 입을 모아 “우와~”하고 감탄했다.
“고등어 많으니까 걱정 말고 마음껏 먹어. 무는 한 사람이 한 조각씩 의무야!”
요즘 채소를 잘 먹지 않는 아이들에게 작은 과제를 내줬다.
“아빠 보기엔 무가 제일 맛있겠는걸?”
남편이 무를 한 조각 떠 앞접시에 넣고 한 숟가락 떠서는 후후 불더니 입에 가득 넣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그냥 먹어도 맛있는데… 역시 막걸리가 있어야겠어.”
그는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옹기잔을 챙겨 왔다.
아빠가 맛있다 하니 아이들도 용기가 났는지 저마다 무를 한 조각씩 가져가 조심스레 먹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빠 말이 맞네요. 꽤 맛있어요.”
“그래? 맛있으면 한 조각 더 먹어도 되는데?”
“아뇨, 엄마. 하나면 돼요. 대신 고등어 많이 먹을게요.”
나도 김이 폴폴 올라오는 고등어를 한 점 떠서 호호 불어 입에 넣었다. 양념이 속까지 잘 배어 무척 만족스러웠다. 남편과 잔을 부딪히고 막걸리를 한 모금 넘기자 시원하고 달달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며 기분을 더욱 좋게 했다. 아이들은 서로서로 언니와 동생의 고등어 숨어있는 작은 가시를 골라내느라 바빴고, 나와 남편은 서로 잔을 채워주고 부딪히느라 바빴다.
언젠가 아이들이 자라고, 나와 남편이 이 세상에 없게 되는 날이 온다면… 아이들은 고등어조림을 먹으며 오늘을 떠올릴까? 아이들도 아빠, 엄마를 따라 서로 막걸리 잔을 채워주고 또 지금처럼 서로 가시도 발라주며 여전히 돈독하게 잘 지내겠지?
괜스레 궁금해지는, 참 따뜻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