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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일보 May 09. 2024

보리 그을음

제주일보 해연풍

김익수 시인. 수필가. 아동문학가



‘서포리’를 아십니까?



요즘 보리가 알알이 여물어 가고 있다. 돌담밭 너머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결에 흔들거리는 보리를 바라보면서 소싯적에 보리그을음의 아름다운 추억을 소환한다.



설익은 보리이삭(석보리)을 베거나 꺾어다가 짚불에 구워먹는 그 맛이란 구수함이 넘쳐난다.



5월 중순 어느 일요일이었다. 오십여 가구를 이루고 있는 분지의 마을엔 번쇠(둔쇠)를 매는 일로 하루일이 시작되고 있다. 학교 쉬는 날이라 외할아버지를 따라 동네 소를 몰아 도랑쉬 오름으로 나선다. 동구 밖을 나서자 풋보리가 어린마음을 유혹한다. 할아버지는 이미 손자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동구 밖을 벗어나자 자신이 경작한 길가 보리밭 돌담모퉁이에 잠시 발걸음을 멈추시더니, 집을 나설 때 준비해온 허리춤에 호미를 꺼내들고는 얼른 밭에 들어가 넉넉하게 보리 한줌을 베어 나오신다. “ 이 보리이삭은 점심 먹고 나서 배가 출출할 때 그을려 주겠다‘고 말씀하시면서, 흉년에 대한 회고의 말을 손자에게 들려주시는 것이다. 춘궁기를 벗어나기 위해 삼월에는 칼을 들고나가 들나무를 캐어먹고, 사월이면 호미 들어 설익은 보리를 베다 먹는 생활을 ‘칼바람 삼월, 호미 받은 사월’ 이라고 불러왔단다. 척박한 땅을 일궈가면서 흉년이 들면 草根木皮로 끼니를 이어가는 삶이었지. 가난을 지게에 메고 고단한 삶의 마루를 얼마나 넘어왔는지 이 할아버지도 셀 수 없단다. 추운 겨울을 지내면서 곳간의 식량은 다 떨어지고 햇곡식이 나오기까지 아직도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었다. 그러나 가족 식구들이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설익은 보리이식을 베다가 한 끼니 한 끼니를 연명해왔던 것이란다.



도랑쉬 오름 자락이 평화롭다. 푸른 초원에는 소떼들이 한가롭게 맘껏 풀을 뜯어먹고 배 부르자 편안하게 누워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소들의 옆구리가 어느새 불룩해지고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떨어지려고 할 때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온다.



소떼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보리밭을 바라보면서 문득 박화목 작사 윤용하 작곡의 우리의 가곡 ‘보리밭’ 생각이 떠오른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노래 귓가에 들여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하늘 눈에 자누나. ’



할아버지, 할머니의 늘 근심과 걱정으로 한 해 농사가 풍년이 들기를 기원했고, 그 풍년은 가족의 살점이었다.



지금은 다른 작물에 밀려 보리를 경작하는 농민들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파릇 파릇 잘 자라 풍년을 맞는 것은 희망이었고 꿈이었다. 초록의 지평선은 이내 누런 황금물결로 넘실대며 여름을 재촉하고 있는 은혜로운 계절, 내일이 어버이의 날이다. 5월 하루가 아니라 늘 어버이의 날이었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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