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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일보 May 09. 2024

해 뜰 날

김길웅, 칼럼니스트



큰아들에게도, 서울서 회사에 다니며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실직으로 안정이 흔들리더니, 신수가 그래서인지 원상으로 돌아가기가 어렵다. 근 30년 살던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와 이것저것 뒤적여봐도, 무엇 하나 잡히는 게 없다.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였다. 그때, 어떻게든 전문직 하날 꿰차지 못한 게 한이 될 것이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다 흘러간 과거지사다. 이제 나이가 회갑으로 치닫고 있으니, 암담한 노릇이다.



도로공사하는 서울 친구네에게서 제주지사를 가져다 뛰어들었으나 안되자, 몇 년 동안 초등학생 대상으로 영어학원을 운영했다. 힘을 기울였지만 끝내 문을 닫아야 했다. 수강생이 불어나므로, ‘옳지, 이러면 되겠지.’ 했는데, 안간힘을 썼음에도 수지 균형을 맞추는 데는 한계가 분명했다. 아이 둘을 학교 보내랴, 네 식구 보듬으랴, 좀체 힘이 닿지 않았다. 노심초사로 애만 태웠다.



학원을 정리하고 사업을 찾아 나섰다. 읍내에 터가 있어 거기 4층을 올려 실내골프장을 냈다. 은행 대출을 받아 집 짓고 설비를 갖춰 개업했다. 활발해 희망적인 출발이었다. 수입도 짭짤했다. 아들이 생광하니 살 것 같았다. 결국 은행 돈장사 시키는 거라던 기우가 사라져 무릎을 쳤다. 불과 2년 빠듯한 일이었다. 옆 마을에 경쟁업체가 생기면서 공기가 썰렁하더니 더 견디지 못했다. 고환율, 고금리, 고물가 시국까지 아들을 옥죄었다.



그래도 아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시련 속에서 무엇 하날 붙잡는 낌새다. 건물의 가치를 재평가해 대출을 늘리는 쪽으로 은행과 협상이 이뤄졌다. 건물의 여유 공간에 착안했던 아들이 업종을 변경해 민박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객실이 여럿 나오는 데다, 아들이 가진 외국인과의 소통 능력을 살리면 좋으리라. 방향성이 좋은 것 같아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극한상황에 선 아들에게 무슨 말을 하랴.



‘나는 널 믿는다. 해보려무나.’ 이건, 아버지로서 아들을 응원하는 신뢰의 격한 언어였다.



아들네는 지난 반년 동안 건물을 개축하느라 흙먼지 속에 살아왔다. 앞으로 한 달, 공사 마무리 시간이 눈앞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한번 현장엘 가보고 싶지만, 늙고 불편한 몸으로 도움이 안될 것이라 마음만 졸이고 있다.



엊그제 아들 내외가 집에 들렀다. 바쁠 텐데 웬일이냐 했더니, 며칠 뒤 어버이날인데 식사를 모시고 싶단다. “무슨 소리냐. 그새 들어오는 건 없고 공사하느라 지출이 바쁜 걸 모를까. 아무 말 마라. 너 전에 많이 샀잖아? 내년에 사라. 그때랑 먹으마.” 잘 나갈 때, 서울 가면 맛집만 찾던 아들이다. 한강변 크루즈식당, 경복궁이라던 거기, 굽이 돌던 남산의 그 큰 식당…. 제 부모 대접에 손이 큰 아들이다.



며느리가 만지작거리던 걸 내려놓는다. “아버님 좋아하는 찐빵이에요.” “그래, 그건, 내가 먹을게.” 현관으로 나서려는 아들을 불러세우고, 90킬로의 거구를 가슴에 안았다. 귀밑에다 입을 대고 나직이, 그러나 묵직이 말했다.



“아들아. 머잖아 해 뜰 날이 올 거야.” “예, 아버지….”



저녁으로 찐빵 네 개를 먹었다. 배가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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