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흔吳昶昕:1908(융희2)~1989, 개업 의사, 호는 인산(仁山).
성산읍 오조리(오졸-개)에서 태어나 성산포의 정신사숙(正新私塾), 성산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이어 현대의학에 뜻을 두어 1935년 평양의 기성(箕城)의학강습소에서 1년 과정을 이수했다.
이듬해 조선총독부에서 실시하는 의사자격 검정시험에 합격, 전남도립 제주의원의 의무촉탁으로 소아과와 내과에서 2년간 재임했다.
부산부립(釜山府立)병원 내과에서 임상실험 경험을 쌓은 뒤에 1938년 9월 제주로 들어와 후생병원을 개업, 일본 큐슈(九洲)제국대학 의학부에서 1년 습득하고 돌아와 다시 후생병원의 문을 열었다.
조국이 해방돼 도립제주의원 원장에 취임했다.
1946년 호열자의 유행이 심해지자 이를 퇴치하는 데 심혈을 기울었다.
1947년 ‘3·1 기념제주도투쟁위원회’가 조직돼 위원장에 안세훈(安世勳), 부위원장에 그가 추대됐다. 이후 부산으로 옮겨 개업의를 이었다.
1947년 2월 23일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고 개회벽두 긴급동의로 명예의장에 스탈린 수상,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원봉(金元鳳), 유영준(劉英俊) 등 6명을 추대하고 제주도 의장단에는 안세훈(安世勳), 이일선(李一鮮), 현경호(玄景昊), 부의장단에는 김택수(金澤銖), 김상훈(金相勳), 김용해(金容海), 오창흔(吳昶昕) 등이 선출되고 집행위원으로 김정로(金正魯) 외 33명을 선출했다.
또 1947년 6월 8일 도내의 의사(치과의사 포함) 20여 명으로 제주도의사회를 창설, 초대 회장이 됐으나 당시 4·3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상적 갈등으로 오해를 받아 이듬해 6월 부산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겼다.
부산 남포동 2가 15번지에 오(吳)소아과의원을 개업, 사회적으로 신망이 두터워 부산의우회(醫友會) 회장, ‘재부산 제주도민회장’으로 추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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