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발칸 여행은 내 MBTI를 완전히 거스르는 P의 여행이었다. 프라하에서 민박 스탭이 크로아티아가 너무 좋았다고 노래를 부르던 것에 넘어가버렸다. 그렇게 뮌헨에 돌아오자마자 급하게 계획을 짜기 시작한 것은 출발 겨우 일주일 전이었다. 파리로 가기 직전, 갈 도시들과 머물 일수만 정리하여 숙소와 교통편, 그리고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입장권만 예약해 두었다.
파리에서 뮌헨에 도착하고 다음날, 또다시 야간버스를 탔다. 11월 3일, 5일, 7일 이렇게 하루 건너서 3번 연속으로 야간버스를 타니 여행 시작부터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뮌헨-자그레브는 9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착하자마자 TISAK에서 대중교통 표를 산 뒤, 렌터카 업체 사무실로 갔다. 9시에 맞추어 직원이 출근했다. 솔직히 이때까지는 긴장하고 있었다. 원래는 Flixbus 같은 고속버스로 이동을 하려고 했으나, 비수기라 운행을 거의 안 해 시간을 맞추기 힘들었다. 그래서 아싸리 차를 빌리기로 마음먹었다—장롱면허가 드디어 빛을 발휘했다. 여러 렌터카 업체를 열심히 비교한 끝에 greenmotion이라는 가성비 렌터카 업체를 선택했다. 25세 미만 운전자가 7일 동안 풀옵션으로 자동변속 차량을 빌리는 데에 단돈 200유로로 해결할 수 있었다. 유일한 흠이라면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업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걱정이 무색하게도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번 여행에 있어, 아니 교환학생 생활에 있어 가장 최고의 선택 중 하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직원은 나를 작은 사무실로 안내하더니 차근차근 계약 조항과 차에 대한 정보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서명을 하고 밖으로 나와 차를 둘러보았다. 차는 내부·외부 다 깔끔했고, 무엇보다도 내장 내비게이션이 한국어 UI까지 지원될 정도 잘 되어 있어 좋았다.
만반의 준비—혹여 내장 내비게이션이 멍청할까 구글맵도 같이 사용했다—를 마치고 차를 뒤로 빼며 천천히 출발하였다. 주차장 공간이 좁았기 때문에 몇 달 만에 운전하는 나로서는 출차하여 도로에 진입하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무사히 시내를 빠져나와—자그레브는 수도임에도 규모가 작았다—남쪽으로 쭉 내려갔다. 처음 1시간은 겨드랑이에 땀이 흐를 정도로 긴장했었다. 게다가 시내를 빠져나온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시골길에 갑자기 안개가 자욱해져서 당황스러웠다. 다른 차량들이 거의 없어서 부담 없이 서행할 수 있었던 것이 참 다행이었다. 그러다 다시 날도 개고 중간에 주유도 하니 슬슬 긴장이 풀렸다. 얼마 안 가 운전한 지 얼마나 됐다고 졸음과 싸우기 시작했다—야간버스의 여파가 너무 컸다. 창문을 활짝 열고 노래도 크게 부르고 간간이 과속도 하며 이겨냈다.
으스스한 시골길, 유령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상상도 해보았다 | 내게 딱 어울리는 아담한 르노 클리오
그렇게 3시간 가까이 주유할 때를 빼고는 쉬지 않고 운전하여 정오쯤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에 도착하였다. 비수기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명성에 비해 차량은 거의 없었다. 제2주차장에서 출발하면서 하루 안에 돌 수 있는 코스로는 E, F, H 3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긴 H코스를 돌고 싶었지만, 비수기라 운영 시간이 짧아 불가능하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F코스를 선택하였다. 주차장에서 호수로 가니 벌써부터 특이한 폭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트를 타고 북쪽으로 이동한 후, 호수를 두르며 이정표를 따라 계속 걸었다. 길은 깔끔하게 잘 닦여 있어서 남녀노소 다 편하게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무들이 선명히 비친 호수와 밀림 속의 폭포를 번갈아 볼 수 있었다. 이 공원 폭포들이 정말로 신기했다. 글로 딱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여태까지 봤었던 폭포들과는 형태가 완전히 달랐다. 굳이 표현하자면, 하얀 폭포가 수풀로 덮인 바위들을 감싸며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며칠 전까지 비가 많이 와 물결이 거세 볼 맛이 더 났다. 그만큼 물이 떨어지는 소리도 웅장해 귀도 즐거웠다.
여러 귀여운 폭포들을 지나다 보니 아바타의 배경이 된 그 유명한 벨리키 슬라프를 마주쳤다. 규모가 압도적으로 큰 것은 아니었지만, 절벽 안에 신비로운 생명체가 살 것만 같은 분위기를 주었다. 물줄기와 그 소리를 한참 동안 감상한 후, 버스를 타는 곳으로 갔다. 그 길에 벨리키 슬라프가 멀리서 보이는 전망대가 있었다. 가까이서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벨리키 슬라프 아래 여러 자식 폭포가 있었다. 큰 폭포 시스템과 노랗게 물든 잎들이 조화를 이루었다.
출발지로 돌아오니 운영 마감 시간까지 애매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E코스의 일부만 추가로 돌기로 했다. 거대한 폭포는 없었지만 호수 끝부분을 가로지르는 나무 데크 길을 걸으며 다양한 폭포들을 볼 수 있었다. 잘 정돈된 밀림이랄까.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홀로 나무들과 폭포들을 가로지르니 마치 탐험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항상 들려오는 콸콸콸 소리가 마음을 비워주었다. 여유롭게 산책하고 나오니 밖으로 나오니 딱 16시가 되었다. 터덜터덜 주차장으로 걸었다. 우리나라의 자연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맑고 드넓은 호수와 독특한 모양의 폭포들. 이런 아름다운 자연을 잘 닦인 길을 걸으며 편하게 감상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지역마다 자연의 생김새가 다르니 여행을 계속 다니지 않을 수가 없다.
신비로운 자연을 마음껏 눈에 담은 것도 잠시, 다음 목적지까지 또 2시간 넘게 운전을 해야 했다. 몇 개월 동안 운전을 안 하다가 하루 만에 5시간 이상 운전을 하게 되었다. 그것도 낯선 외국에서. 게다가 어둑해질 한르과 가파른 산길을 생각하니 선득해졌다. 긴장감이 확 돌면서, 자연으로부터 치유받은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