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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츠윌리엄 다아시 Apr 18. 2024

파리 1

프랑스

첫째 날

Roland Garros Stadium - 에펠탑 - Shakespeare and Company

 전날 밤 뮌헨 ZOB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파리에 왔다. 파리에 오기까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원래 23시 55분 출발 Flixbus를 예매했었으나, 당일 오후에 출발 시각이 20시로 앞당겨졌다. 그러나 오전부터 친구들과 님펜부르크 궁전도 다녀오고 밥도 같이 먹고 하느라 바빴던 나는 이 메일을 읽지 않고 넘겼다. 밤에 짐을 꾸리기 직전에 확인차 어플에 들어가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이미 버스는 떠났다. 매우 당황스러웠다. 일단 침착하게 인터넷으로 대처 방안을 검색해 보았으나, 고객센터에 전화해 보는 방법 말고는 더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환불 또는 교환이 가능했는데, 다음 파리행 버스는 한참 뒤에 출발해서 예약해 둔 롤랑 가로스 투어에 맞출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환불 조치만 받고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다행히 BlaBlaCar에 23시 30분 출발 버스가 있었다. 다만 당일 예약이라 그런지 가격이 무시무시했다. 무려 110유로로, 이전에 예매했던 Flixbus 표값의 2배가 넘었다. 그래도 롤랑 가로스를 포기할 수는 없는 법, 울며 겨자 먹기로 16만 원짜리 야간버스를 타고 파리에 갔다.

 11시쯤, 비가 자작자작 내리는 파리 베르시 역에 도착했다. 다음날 갈 Accor Arena를 슬쩍 지나쳐 숙소가 있는 빌레쥐프로 갔다. 이번에도 역시 한인민박을 선택했다. 다른 것보다도 한식이 제공된다는 점이 매우 매력적이기 때문이었다. 건물에 들어갔는데 살짝 아쉽다는 느낌을 받았다. 직전 프라하에서 묵었던 민박이 완벽했던 것 때문일까. 직원 분들은 모두 친절하셨으나, 시설이 비교적 아쉬웠다. 그래도 지불한 가격을 생각하면 결코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파리 마스터스 4강 경기를 보기 위해 입장하는 관객들 | 지하철 역이 파리 마스터스 광고로 도배되어 있었다

 침대에 누워 조금 쉬다가 햄버거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롤랑 가로스로 갔다. 롤랑 가로스 또한 윔블던과 같은 그랜드 슬램으로, 매우 권위 있는 프로 테니스 대회이다. 롤랑 가로스는 윔블던보다 작다고 느껴졌다. 실제로 투어 가이드는 이곳의 부지가 윔블던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투어도 메인 코트인 필립 샤트리에 코트 위주로 진행되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잔디 관리를 이유로 네트와 라인, 의자 등을 다 제거해 놓아 잔디밭만 덩그러니 있던 윔블던과 달리 모든 것이 그대로 남겨져 있던 점이다. 당장 저 클레이 코트에 가서 테니스를 치고 싶었다. 원래는 안 되지만, 가이드가 한눈팔 때 슬쩍 코트의 흙—정확히는 분쇄한 벽돌 가루다—을 만져보았다. 뮌헨에서 이용했던 클레이 코트들의 흙보다 훨씬 더 곱고 부드러웠다. 이런 좋은 코트에서 테니스를 치는 상상을 하며 경기장 밖으로 나왔다. 나달 동상을 마지막으로 보고 기념품점에 가서 테니스 타월과 반팔 티셔츠 한 벌을 사고 나왔다—10만 원이나 쓴 건 안 비밀.

곱디고운 흙으로 덮인 클레이 코트 | 자세는 나달인데 얼굴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파리 생제르망 축구장을 지나 지하철 역으로 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매우 높고 맑았다.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기에 아쉬워서 유명한 랜드마크들을 들러 보기로 했다. 먼저 에펠탑을 보러 갔다. 팔레 드 샤오에 가서 강 건너의 에펠탑을 바라보았다. 기억의 파편 하나를 찾았다. 15살 때 이곳에 와서 칙칙한 에펠탑이 서있는 것을 본 장면이 뇌를 스쳤다. 날도 좋고 기억도 찾고 에펠탑이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강을 건너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짙은 은색으로 보였던 것이 동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후 시테 섬 쪽으로 가서 Shakespeare and Company에 갔다. 여기도 기억의 파편이 또 하나 떨어져 있었다. 이 서점 옆에서 파리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들었던 기억도 남아 있었다.

15살 때 에펠탑 전망대까지 계단을 걸어올라 간 기억도 났다 | 해가 지고 조명이 켜진 낭만적인 센 강

 숙소에 돌아와서는 바로 석식을 먹었다. 주 메뉴는 수제비였으나 그보다는 기본 반찬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다양한 김치들과 멸치볶음, 소시지 반찬까지 모두 맛있었다. 수제비는 남겼지만, 밥과 반찬들은 한 번씩 더 떠서 먹었다. 자기까지에는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민박 분위기도 조용했고 몸도 피로해서 일찍 침대에 누웠다. 야간버스를 타고 오기도 했고 다음날 또 야간버스를 타고 뮌헨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꼭 그랬어야만 했다.


둘째 날

Accor Arena

 다시 한번 야간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늦게 일어났다. 조식은 제공되지 않아 독일에서 가지고 온 방울토마토로 끼니를 때웠다. 최대한 늦게 체크아웃을 하고 Accor Arena로 갔다. 내가 교환학생에 있는 동안 아쉽게도 그랜드 슬램이 유럽에서 열리지 않아서, 그다음 급의 대회인 마스터스 1000 파리 오픈 결승을 보기로 했다. 이 경기를 보기 위해 무려 4달 전에 예매를 했었다. 생애 첫 프로 테니스 경기 직관이라 살짝 긴장되었다. 3.3유로짜리 샌드위치를 하나 사 먹으며 대기줄에 섰다. 얼마 안 기다려 보안검사와 표검사를 받고 입장했다. 경기 시작까지 시간이 남아 사진을 찍으며 기다리다 들어갔다. 경기장은 마치 근미래의 테니스 대회를 보는 듯했다. 카메라가 경기장 위를 돌아다니는 것이나 조명, 육각형을 기본으로 하는 그래픽까지 전통적인 그랜드 슬램들과는 달랐다. 먼저 시작된 복식경기는 확실히 인기가 적었다. 결승인데도 좌석이 절반 정도밖에 차지 않았다. 그래도 경기는 매우 재미있었다. 프랑스 사람인 바셀린 선수가 속한 조를 응원하는 사람이 대다수였고, 그 조가 결국 우승을 차지했다. 준우승을 한 조에는 보파나라는 40세 인도 선수가 있었는데, 이름을 가지고 놀리는 관중들도 있었다. 또 신기한 응원 문화가 하나 있었는데, 누군가 갑자기 "빠라라빠빠라"라고 외치면 "올레"라고 다른 관중들이 외친다. 물론 경기가 진행되고 있지 않을 때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그래도 누가 약속이라도 한 듯, 반응해 주는 것이 인상 깊었다.

대회 관리자가 직접 손글씨로 쓴 대진표 | 120유로를 주고 산 좌석

 곧바로 단식 결승전 선수들이 입장하고 몸을 풀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람들도 다 들어서며 관중석은 꽉 메워졌다. 복식경기와는 다르게 긴장감이 감돌았다. 선수는 조코비치와 디미트로프. 제2의 전성기가 찾아온 디미트로프를 조금 더 응원했지만, 조코비치는 로봇 그 자체였다. 조코비치의 스트로크들은 매우 정교했고, 반면 디미트로프의 원핸드 백핸드는 영점 조정이 안 되어 있었다. 조코비치가 깔끔하게 2: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경기가 끝나고 조코비치가 세리머니를 하고 인터뷰를 하는 동안 디미트로프는 넋이 나가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큰 대회에서 결승까지 왔는데, 눈앞에서 우승컵을 놓쳐버렸다. 사람들은 조코비치의 우승을 축하해 주는 동시에 디미트로프에게 위로의 박수도 힘차게 보내주었다. 조코비치도 인터뷰에서 디미트로프에게 큰 존경심을 보였다. 나도 디미트로프를 응원하게 되었다. 이후 화려한 시상식이 열렸다. 준우승의 아픔을 씻어내고 디미트로프도 시상식을 즐겼다. 디미트로프가 앞으로도 잘해서 우승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 

한동안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좌절하고 있던 디미트로프의 모습 | 반대편 자리에서 보았다면 더 멋있었을 텐데

 버스 출발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베르시 역 주변을 돌아다니며 저녁을 먹을 곳을 찾았다. 그러다 케밥 식당을 발견했는데, 구글맵 평점도 괜찮고 아다나 케밥을 팔길래 이곳에 들어갔다. 양 냄새가 있긴 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아랑곳하지 않고 다 먹어 치웠다. 아무리 익숙해도 야간버스에 타는 발걸음은 늘 무겁다. 이날도 버스에 올라타기 무척 싫었지만, 12시간만 버티면 집에 도착한다는 그 상상 하나로 버텼다. 돈을 많이 벌어서 1박 2일 여행을 야간버스로 왕복하는 일은 또다시 없도록 해야지.

 테니스의, 테니스에 의한, 테니스를 위한 1박 2일 파리 여행을 옹골차게 다녀왔다. 정말 다른 목적은 하나도 없었다. 15살 때 닷새 동안 오기도 했었고, 3달 뒤에 또 가족들이랑 갈 것이기 때문에—그래서 제목도 '파리 1'이다—아쉬울 것도 전혀 없었다. 내가 테니스에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스스로 깨달은 짧고 굵은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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