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Kaivopuisto 공원 - Uspenski Cathedral
핀란드 헬싱키는 폴란드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공항 외벽부터 일단 노출 콘크리트 공법으로 만들어져 있어 딱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밖으로 나와도 직육면체 빌딩들의 비중이 훨씬 많았다. 그래도 황색 벽돌 위에 민트색 지붕으로 지어진 헬싱키 역―여기서도 플립5 광고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은 봐줄 만했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가는데 중간에 빨간 옷을 입은 건장하다 못해 건달 무리 같은 남자들이 서있었다. 자세히 보니 덴마크 국기를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이날 저녁에 핀란드와 덴마크의 축구 경기가 있어서 응원하러 온 덴마크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지나쳐 도시 정중앙에 있는 호스텔 다이아나 파크에 도착하였다. 값싼 호스텔이라 그런지 깔끔하지는 않았으나 못쓸 정도는 아니었고 있을 것들은 다 있었다. 그러나 내 도미토리에 딱 들어간 순간 적잖이 당황했다. 내 침대를 제외한 모든 7개의 침대가 널브러진 개인 짐들―이때는 그 짐들이 복선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로 덮여있었다. 점심을 먹지 않아 무척 배고팠기 때문에 가방만 2층 침대에 올려둔 후 주변 식당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호스텔 바로 옆에 평점이 꽤 좋은 식당이 있어 바로 거기로 들어갔다. 내가 찾은 식당은 Café Bar No 9라는 퓨전 음식점이었다. 북유럽에 오면 해산물, 특히 연어를 꼭 먹어보고 싶어서 Salmon이라는 단어부터 열심히 찾아보았다. 스테이크는 너무 비쌌고 샐러드로는 밤까지 못 버틸 것 같아서 Fisu라는 연어 볶음면을 맥주 한 잔과 함께 주문했다. 먼저 나온 맥주를 절반 정도 마시니 음식이 나왔다. 맛과 비주얼 모두 재해석된 팟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땅콩이 없는 대신 치즈 가루와 양배추가 있었다. 조금 짭조름했으나 담백한 연어 살코기랑 같이 먹으니 간이 딱 맞았다. 다만 고수가 한 바가지나 들어간 점은 아쉬웠다. 내가 버틸 수 있는 고수 최대치를 벗어나서 다 먹고 식당에서 나올 때는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그래도 높디높은 물가를 자랑하는 북유럽에서 음식을 남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고수만 남기고 다 비웠다. 고수만 빼면 정말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소화도 시킬 겸, 해가 지기 전까지 도심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남쪽으로 쭉 내려가서 발트해를 따라 Kaivopuisto 공원 둘레를 돌아 걸으며 Uspenski Cathedral로 갔다. 헬싱키 역과 외벽 디자인이 비슷했지만 더 선명했다. 벽돌 색깔은 더 진했고 민트색 지붕 위에 금색 십자가 장식이 있어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움을 주었다. 언덕까지 올라갔으나 아쉽게도 시간이 늦어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대신 자기를 봐달라는 듯 강렬한 붉은빛을 내며 지고 있는 태양을 멍하니 바라보다 내려왔다. 핀란드 대통령궁을 지나 돌아가는 길은 바르샤바랑 살짝 비슷했다. 수도라 그런가 역 주변에는 신식 빌딩들이 들어서 있지만, 이곳을 벗어나면 옛날 건물들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을 때문인 것 같다. 돌아가는 길에 밤에 먹을 맥주와 주전부리, 다음날 아침을 사러 마트에 들렀는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맥주 가격이 어제 뮌헨에서 보던 것의 2배가 넘었기 때문이다. 과자는 포기하고 다음날까지 마실 맥주 2캔과 아침으로 먹을 수프만 샀다.
전날까지 동행과 같이 다니다 혼자가 되니 하루 종일 내내 심심했다. 바르샤바에 있을 때보다 정도가 더 컸던 것 같다. 도시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동행이 있다 없으니 더 그런 것 같다. 편하게 한국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말동무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시벨리우스 공원 - Temppeliaukion Church - 깜삐 예배당 - 헬싱키 중앙도서관 Oodi - 헬싱키 대성당 - Löyly Helsinki
8시 알람에 힘겹게 몸을 일으켜서 전날 사둔 수프를 먹었다. 순록 치즈 수프였는데, 치즈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었는지 매우 느끼했다. 오늘 들를 곳이 많았기 때문에 얼른 채비를 하고 나왔다. 먼저 유명한 조각상이 있는 시벨리우스 공원로 갔다. 아쉽게도 공원은 당시 공사 중이었고 시벨리우스 조각상을 보러 가는 길만 열려있었다. 멋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독특해서 지금도 그 모습은 기억에 남아 있다. 숙소에서 공원까지 40여 분을 걸어갔다 보니 금방 배가 꺼져 공원을 떠나기 전에 블로그에 많이 나온 Cafe Regatta에 갔다. 여러 블로그에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먹었던 핫초코렛과 아몬드 크루아상을 먹었다. 가격은 둘이 합쳐 무려 8.5유로가 나왔다. 그때는 가격에 크게 상관 안 하고 맛있게 먹었지만, 이제 와서 보니 너무 사치스러운 소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Temppeliaukion Church와 깜삐 예배당에 들렀다. 둘 다 입장료가 5유로씩이었는데,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Temppeliaukion Church는 돌무더기 벙커(?) 안에 있었다. 그것치고 내부는 꽤 넓었다. 특이하게 벽이 깎지 않은 듯한 돌로, 천장은 큰 목재 원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폴란드에서 봐왔던 전형적인 유럽 성당과는 전혀 다른 소박한 느낌을 주어 신선했다. 대신 스테인드글라스와 그림들이 없다는 점은 아쉬웠다. 그다음 간 깜삐 예배당은 외관을 보는 순간 기대를 많이 했다. 아랫면이 더 좁은 원뿔대 모양이었는데, 외벽이 온통 깔끔한 나무로 되어있어서, 내부는 또 어떻게 미니멀리즘을 구현했을까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러나 5유로를 내고 예배당 내부를 들어갔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어서 실망스러웠다. 내부 벽은 물론이고, 의자와 강연대까지 거의 모든 것들이 밝은 색 목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더구나 내부는 완전히 조용했기 때문에 더 깔끔하게 느껴졌는데, 그렇다고 성스러운 장소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무 단순해서 그런가 겨우 이 방을 보러 무려 5유로나 주었다는 상실감이 컸기 때문인 것 같다. 돈이 아까워 5분은 감상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음 행선지는 국립 도서관이었다. 이 건물도 매우 독특하게 생겼다. 외벽 대부분은 깜삐 예배당과 마찬가지로 목재였고 비스듬히 안쪽으로 깎여있어 들어갈 때 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반면 고층 일부는 유리창으로 되어 있어 위에서는 시내 경치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나름 멋있긴 했지만, 굳이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지었나 싶었다. 내부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혼자 조용히 공부하고 독서하기에는 알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켓 스퀘어에 가서 점심으로 간단히 핫도그를 먹고 새하얀 헬싱키 대성당을 구경했다. 여기는 그래도 고전적인 성당이었지만, 다른 곳들에 비해 내부에 뭐가 별로 없었다. 깔끔한 하얀색 벽에 의자들만 많이 있었고, 그림이나 스테인드 글라스는 거의 없었다.
돌아다닌 거리 치고는 매우 일찍 숙소에 돌아왔다. 16시 사우나 예약까지 시간이 꽤 남아 스코틀랜드 증류소 예약을 하러 부엌으로 갔는데, 동양인 여자 2명과 외국인 아저씨 1명이 있었다. 내 할 일을 하던 도중 갑자기 누군가가 우리나라 발라드를 틀었다. 처음에는 아 동양인 여자 중 1명이 틀었나 보다 생각하며 다시 일에 집중하던 찰나, 나머지 여자 1명이 내가 노래를 튼 거냐고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한국인을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갑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다른 여자한테도 말을 걸었는데, 그 사람도 아니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외국인 아저씨가 튼 것이었다. 그래서 이 노래를 왜 틀었냐고 물어보았는데, 가사는 모르지만 자기는 멜로디가 엄청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살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영어로 대화하고 싶지 않아 한국인 여자 둘과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 내게 말을 건 분은 최근 공군 대위에서 퇴역한 30대 초반 누님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이번 학기 프라하로 교환학생을 온 한 살 어린 동생이었다. 그 교환학생 친구는 그전에 노르웨이에서 발을 다쳐서 깁스를 하고 있었는데, 붙임성이 좋은 대위 누님이 그것을 보고 이런저런 조언을 많이 해주었다. 그렇게 그 아저씨를 무시한 채 한국어도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사우나에 다녀왔다.
Löyly가 여러 블로그에서 많이 소개가 되어 이곳으로 예약을 잡았다. 개장 시간인 16시로 맞춰 예약을 잡지 않았으면 제대로 못 즐길 뻔했다. 초반에는 몇 명 없었지만 점점 사람이 많아져 나중에는 사우나실에 들어가려면 기다려야 하는 상황까지도 나왔다. 이곳의 특이한 점은 사우나에서 몸을 데우고 식이기 위해 일반적인 냉탕이 아닌 발트해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이 사실 때문에 이곳을 꼭 가보고 싶었기도 했다. 바다로 들어가려고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는데 살짝 무서웠다. 해수욕장이 아니어서 그런지 바닷물 치고 꽤 맑아, 발 밑에 해파리가 둥둥 떠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물릴까 봐 걱정이 되긴 했지만,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면 해파리로 인한 사고가 지금까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들어갔다. 바닷물은 9월치고 차가웠다. 개구리 수영을 하며 열심히 몸에 열을 올렸다. 사실 그보다는, 수영을 배운 지 너무 오래되어 물 위에 눕는 법을 잊어버린 것이 더 컸다. 열심히 개구리 수영을 하다가 지쳐 다시 올라가 사우나 방에 들어갔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따뜻해서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중간중간 사람들이 돌에 물을 부을 때마다 나오는 증기 때문에 기온이 급격히 올라가 힘들어졌다. 아주 조금만 움직여도 몸에 열이 확 올라오는 유쾌하지 않은 느낌은 우리나라 사우나랑 똑같았다. 혼자 오기가 생겨 한참을 버티다 세 번째 물을 부으니 도저히 못 버티겠어서 도망치듯 나왔다. 그렇게 서너 번을 더 왔다 갔다 하며 피로를 싹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배를 채우기 위해 시내로 돌아갔다. 원래 해마 라빈톨라를 가려고 했으나 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괜찮아 보이는 Lappi Ravintola라는 식당에 들어갔다. 모든 메뉴가 너무 비쌌지만, 순록 고기도 먹어보고 싶고 수프도 먹고 싶어 결국 2가지를 다 시키게 되었다. 먼저 애피타이저로 연어 수프가 나왔다. 전혀 느끼하지도 않고 담백해서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핀란드에서 먹었던 음식들 중 가장 맛있었다. 하지만 이후에 나온 순록 고기는 아쉬웠다. 폴란드에서 먹었던 고기들처럼 느끼해서, 크랜베리 없이 고기만 먹기는 힘들었다. 그래도 엄청 배고팠던지라 감자만 남기고 다 먹었다.
호스텔로 돌아가서는 오후에 봤던 한국인들이랑 수다를 떨었다.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아까 이상한 아저씨가 우리나라 노래를 틀던 것은 알고 보니 그 한국인들한테 찝적거리는 것이었다. 저녁에도 부엌에서 계속 말을 걸어왔는데, 대놓고 무시하니 다른 여자들에게로 가버렸다. 그렇게 불청객을 쫓아내고 서로 여행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았다. 두 분 다 이미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다녀와서 내게 많은 팁을 알려주었다. 덕분에 스톡홀름에서 맛집도 알게 되었고, 오슬로에서도 뭉크의 '절규' 그림들을 수월하게 볼 수 있었다. 이틀 동안 외로웠는데 다시 한국인을 만나 대화하니 너무 즐거웠다. 게다가 대위 누님이 이전에 아일랜드에서 직접 사 온 아이리시위스키, Knappogue Castle 12년도 맛보게 해 주었다. Jameson보다 더 부드럽고 적당히 달아 내게 딱 맞았다. 아이리시위스키는 Jameson밖에 마셔보지 않았었는데, 이 위스키를 마시고 다른 아이리시위스키들도 시도해보고 싶어졌다. 마셔보고 싶은 스카치위스키만 해도 수백 가지인데, 아이리시위스키도 파보고 싶고... 빨리 취업해서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
헬싱키는 내 기대 이하였다. 안 그래도 날씨도 우중충하고 혼자 다녀 심심했는데 콘텐츠도 없으니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 예쁘거나 화려한 건물도 별로 없고, 음식도 엄청 맛있지도 않았는데, 물가만 너무 비쌌다. 그래도 발트해에서 직접 수영을 해봤다는 사실과 호스텔에서 우연히 한국인들을 만나서 대화한 것은 인상 깊었다. 다른 북유럽 도시들은 물가가 비싼 만큼 내게 좋은 추억을 남겨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