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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츠윌리엄 다아시 Dec 19. 2023

탈린

에스토니아

성 올라프 교회 - 파트쿨리 전망대 - 알렉산더 네브스키 대성당 - 성 니콜라스 교회 - 탈린 시청 - 톰페아 성

 6시 30분에 탈린으로 출항하는 크루즈를 타기 위해 5시에 일어나 후딱 준비를 마치고 정겨운 호스텔을 나왔다. 크루즈 터미널이 구글맵으로 본 것보다 거리가 꽤 되어 늦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빠른 걸음으로 갔다. 다행히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전광판을 본 순간 허탈해졌다. 내가 타려고 했던 크루즈가 알고 보니 7시 30분 출항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6시 30분 출발이라 생각했던 것이었는지... 한심한 나를 탓하다가 1시간 늦게 출항한다고 착각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애써 정신 승리를 하며 숨을 돌렸다. 터미널 밖에서 본 크루즈는 정말 컸다. 그러나 내부로 들어가니 밖에서 봤을 때보다도 더 커 보였다. 웬만한 지역 공항 탑승장보다 규모가 크게 느껴졌다. 면세점도 복층으로 있었고, 도박장, 카페, 식당도 다 있었다. 술 구경을 실컷 하다 피곤해져서 소파에 앉아 한숨 잤다.

 2시간쯤 뒤에 탈린에 도착했다. 짐을 터미널에 맡기고 바로 구시가지―그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라고 한다로 걸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가까운 핀란드보다는 오히려 먼 폴란드와 분위기가 더 비슷했다. 건물 외벽이 파스텔 톤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느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지붕이 온통 적갈색 벽돌로 통일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든 도로가 울퉁불퉁한 돌―발목 삐기 딱 좋다이었다. 그래서 구시가지 전체가 중세 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길가에 차량들이 없었다면 정말 중세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먼저 구시가지 전체 느낌을 알고 싶어, 성 올라프 성당의 전망대로 올라갔다.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니 구시가지 쪽과 나머지 부분은 분위기가 크게 달랐다. 구시가지 쪽만 온통 붉게 물들어있는 가운데 듬성듬성 하얀 첨탑들이 솟아있었다. 한참을 감상하다 다시 내려와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돌계단을 올라 언덕 위로 올라가 파트쿨리 전망대에 갔다. 여기서도 도시를 내려다보았는데, 고도가 높은 성 올라프 교회의 전망대에서와 달리 붉은 지붕들을 훨씬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이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심심찮게 독일어가 들린 것으로 보아, 의외로 독일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도시라는 추측을 했다. 독일의 소도시들도 예쁘다고 하던데, 그들의 눈에 탈린만 하지 못한 걸까?

성 올라프 교회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전경 | 파트쿨리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전경

 알렉산더 네브스키 대성당을 지나 자유 광장까지 내려갔지만, 여기는 별로 볼 게 없어 마트에서 빵 한 조각만 사 먹으며 돌아갔다. 중간에 성 니콜라스 교회에 들렀다 시청으로 향했다. 처음 시청 건물을 봤을 때는 별 볼일 없는 성당인 줄 착각했었다. 그만큼 시청 치고는 아담하고 조촐했다. 안에는 들어갈 수 없어 주변 광장을 둘러보다가 톰페아 성으로 갔다. 성이 둘러싸고 있는 건물은 폴란드에서 많이 봤었던 평범하고 작은 궁전이었다. 하지만 그와 그의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이 매우 웅장했다. 회색 벽돌로 쌓아 올려진 성벽은 언덕 아래부터 위까지 전체를 두르고 있을 정도로 높았다. 그리고 중간중간 있는 첨탑마다 빨간 지붕은 빠지지 않고 있어, 적절한 담백함을 유지하였다. 성벽 중간에 있는 Tall Hermann이라는 엄청 높은 첨탑 위에는 에스토니아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너무 높아 이 국기와 내 얼굴을 동시에 사진으로 담기 어려웠다. 여기서도 구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올라갈 수 없어서 아쉬웠다.

두 손 모아 구걸하는 디멘터 | 담백하지만 주변과 잘 어울리고 웅장해서 좋았다 | 이 성을 정복하기 여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돈을 아끼려면 저녁을 굶어야 했기 때문에 최대한 버티려고 노력했다. 14시가 되어서야 이 정도면 충분하지 생각하며 밥을 먹기로 했다. 탈린에 오면 꼭 한 번 가보라는 후기가 많은 올레 한자라는 식당에 쭈뼛쭈뼛 들어갔다. 통상적인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야외에는 빈자리가 없는 것으로 유명세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식당이 유명한 이유는 '중세 시대 컨셉'을 한결 같이 고수한다는 점이다. 모든 종업원이 중세 시대 복장을 하고 있고, 내부도 인조적인 조명 없이 오로지 햇빛과 촛불로만 밝히고 있다. 또 내벽과 메뉴판에도 중세풍의 그림이 가득했고, 메뉴 이름에도 'Game and Meats' 등 중세 시절 사용하던 용어를 그대로 썼다. 다행히 내부에는 빈자리가 있었다. 일단 여러 블로그에서 맛있다고 한 흑꿀맥주를 주문한 뒤, 메뉴를 찬찬히 보았다. 어제 실패했던 순록 고기에게 만회할 기회를 주고자 Deer Fillet을 선택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나쁘지 않았다. 양이 적은 것은 아쉬웠지만, 어제처럼 느끼하지 않고 부드러운 식감도 좋았다. 그렇다고 한우를 제칠만큼 맛있는 것은 아니었고, 순록 고기를 먹어봤다는 경험을 쌓는 데에 의의를 두었다. 총 50유로가 나왔는데, 아무리 여기가 북유럽이고 확고한 컨셉을 유지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비쌌다. 남은 시간은 굶겠다는 다짐이 더 굳세 졌다.

중세 시대 의상을 입고 있는 종업원이 오로지 촛불과 햇빛에만 의존하며 일하고 있다 | 양이 너무 적어 살짝 실망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까지 시간이 한참 남아 시청 앞 광장에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멍 때리며 시간을 보냈다. 따뜻한 햇살 아래 유모차를 끄는 여자들,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할아버지들, 걱정 없이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북유럽의 평화로움을 마음껏 즐겼다. 오랜만에 우리나라에 있는 친구들이랑도 통화하며 핀란드에서 느꼈던 외로움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스톡홀름행 비행기는 21시 이륙이라 탈린 공항에서도 한참을 기다렸다. 신기하게도 이 공항 탑승장에 탁구대가 있었다. 조잡하지만 라켓과 공도 있어 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며 탁구를 즐겼다. 심심한 아저씨들이 종종 와서 마음속 깊이 숨어있던 승부욕을 다시 끄집어내었다. 탁구를 치는 순간만큼은 그들의 표정이 되게 아이 같아 보였다. 공항 탑승장에 탁구대를 설치하는 간단하지만 재치 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사람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기발한 아이디어는 우리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을 이용하는 법. 하지만 그것들을 조화롭게 융합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나라 공항에도 탁구대를 설치해서 이용객들이 건강하게 시간을 때우도록 하면 좋겠다. 하지만 한편, "아직 이런 공용비품을 설치하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북유럽 사람들만큼 성숙하지 못하나?"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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