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뮈르달 - 플롬 - 스테가스타인 전망대
뮈르달행 기차에 타고 30분쯤 가니 신기한 광경이 창문 밖으로 펼쳐졌다. 호수 위에 얇은 구름 층이 산중턱에 걸쳐져 있고 그 위에 산꼭대기가 보였다. 고도가 그리 높은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이렇게 구름이 생길 수 있는지, 너무 신기했다. 내 시야 중간을 구름이 가로지르고 있는 난생처음 보는 광경을 보니, 기차를 타고 더 가면 어떤 더 멋진 절경이 펼쳐질지 잔뜩 기대하게 되었다. 2시간 정도 자다 일어나 창밖을 보았는데, 호수 넘어 뭉툭한 산들이 보였다. 살짝 든 노란 단풍과 맑은 호수가 가을 분위기를 은근슬쩍 풍겼다. 조금 더 가니 호수는 점점 작아지고 저 멀리 있는 산의 꼭대기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드문드문 있는 주택들을 보며 이곳에 어떻게 사람이 살지라는 의문을 정도로 뭉툭한 산과 깨끗한 물밖에 없었다.
뮈르달역에서 플롬행 산악열차를 타기 위해 잠시 대기했다. 역은 산중턱에 있었는데, 역 아래로는 알록달록한 주택 여남은 채가 매우 작은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산악열차에 탑승하여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같이 다니던 아저씨가 내게 에너지바를 주었다. 저녁에 비싼 식당에 갈 계획이라 점심을 먹지 않기로 한 내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열차를 타며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다 어떤 큰 폭포에서 열차가 잠시 멈추었다. 잠시 열차에서 내려서 Kjosfossen 폭포를 감상하라고 정차한 것이었다. 폭포는 정말 컸고 그만큼 소리도 엄청났다. 폭포에서 튀는 물 때문에 선글라스와 카메라 렌즈가 흐려졌다. 아저씨와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다시 폭포를 감상하는데, 갑자기 빨간 옷을 입은 여성이 폭포 옆 절벽에서 나타나 신비한 음악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사라지더니 다른 절벽에서 나타나 또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들의 신비한 춤을 끝으로 다시 열차에 탔다. 오히려 이전 기차에서 보던 풍경보다 나무가 훨씬 더 우거져 있었다. 푸른 나무들 사이로 이따금씩 흘러내리는 폭포들을 지나치다 보니 어느새 플롬에 도착해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스테가스타인 전망대 티켓을 끊은 후, Flåm Hostel에 체크인하고 짐만 던져놓고 나왔다. 셔틀버스의 출발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따뜻한 햇살 아래 어느 곳을 보아도 맑은 물과 푸른 산이 보였고, 소음도 거의 없이 산책하는 사람들만 있으니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졌다. 호수에서는 큰 산소통을 달고 잠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6시가 되어 버스에 탔다. 전망대까지는 30분 정도 걸렸다. 버스에서 내린 순간 입을 떡 벌어졌다. 양쪽으로 길게 이어진 절벽 사이 넓은 강이 있었다. 이게 전부였지만, 그 장엄함이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미끄럼틀처럼 생긴 전망대에 들어가서 이 장면을 열심히 사진에 담았다. 빙하가 산을 깎아 이렇게 큰 협곡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30분 동안 전망대에서 하염없이 피오르를 감상하다 다시 버스를 타고 마을로 돌아왔다.
지금까지 눈에 아름다운 것들을 담았으니, 이제 입에 아름다운 것들을 담을 차례가 되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Ægir microbrewery에 갔다. 이 식당은 어느 방송에도 나오고 여러 블로그에서도 추천되었는데, 무엇보다도 맥주가 맛있다는 후기를 보고 지체 없이 결정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사실상 플롬에서 유일한 제대로 된 식당―그만큼 가격은 사악하다―인 듯했다. 자신들이 바이킹의 후예임을 강력하게 피력하는 듯 1층은 투박한 화로와 괴상한 의자들로 나를 맞이했다. 비교적 정상적인 2층으로 올라가 맥주로는 지체 없이 5종 맥주 세트를, 음식으로는 한참을 고민하다 Andvare라는 생선 요리를 골랐다. 먼저 맥주가 나왔는데, 바로 왼쪽 필스너부터 오른쪽 포터까지 한 모금씩 마셔보았다. 역시 내 입맛에는 IPA가 가장 맛있었지만 나머지도 다 괜찮았다. 항상 이런 맛보기 세트를 주문해 한 모금씩 마셔보고 나면, 차라리 가장 맛있는 거 한 잔을 시킬 걸 후회하곤 한다. 하지만 세트를 시켰기 때문에 비로소 이러한 '후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라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곧이어 음식도 나왔다. 익힌 대구를 짭조름한 양념에 조린 요리였다. 국물은 엄청 맛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육류를 시킬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대구 자체의 식감이 너무 쉽게 부서지기도 하고 밥 없이 수프 같은 음식을 먹으니 그런가 메인 요리가 아닌 듯한 느낌을 받아서 그런 것 같다.
저녁을 다 먹고 나서는 소화시킬 겸 다시 마을을 거닐었다. 둔턱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일몰을 감상하다 서늘해져서 숙소로 돌아왔다. 이 숙소는 특이하게도 샤워실을 1박당 1번―심지어 샤워 시간도 겨우 6분이다―밖에 쓰지 못한다. 체크인할 때 코인을 하나 주고, 더 사용하고 싶으면 추가로 돈을 주고 코인을 사야 했다. 오늘 저녁에 씻을까 내일 아침에 씻을까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다가, 땀도 별로 안 흘렸고 아침에 머리는 꼭 감고 싶었어서 내일 아침에 하기로 했다. 영화 같은 곳에서 평화로운 밤을 보내 너무 행복했다. 다음날은 또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기대하며 들뜬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구드방겐 - 보스
2시간 동안 크루즈를 탄 끝에 구드방겐에 도착했다. 곧바로 보스행 버스―950번 버스로 이번 여정에서 유일하게 예약이 필요 없는 교통수단이었다―에 탔다. 암벽에서 가늘고 길게 떨어지는 폭포들과 호수를 감상하다 보니 금세 플롬에 도착해 있었다. 플롬에서 베르겐까지는 다시 기차를 타고 갔는데, 2시간 가까이 걸리고 창밖에 보이는 풍경들이 너무 익숙해져서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내가 지금 노르웨이에 대한 좋은 기억을 2가지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송네 피오르를 위에서, 앞에서, 안에서 직접 보았다는 것―다른 하나는 베르겐에서 좋은 사람을 만난 기억이다―이다. 푸르른 나무들과 절벽 사이로 흐르는 넓은 강, 중간중간 흘러내리는 폭포들, 그리고 기묘하게 생긴 구름까지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할 압도적인 자연을 볼 수 있었다. 여태 내가 본 자연경관 중 호주에 있는 그레이트 오션 로드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자연에 진심인 사람들은 노르웨이에 3대 트레킹을 하러 온다고 들었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꼭 부모님을 모시고 3대 트레킹을 같이 하고 싶다. 등산과 자연을 좋아하시는 부모님께서 노르웨이의 피오르들을 보시면 엄청 행복해하실 것이 분명하다. 사소한 효도들을 꾸준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끔은 큰 이벤트도 필요한 법이니까. 돈을 열심히 벌어서, 가장 행복한 여행을 보내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