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브뤼겐 - Bergenhus 요새 - Fishmarket
그림 같던 피오르를 뒤로 하고 베르겐에 도착한 것은 15시쯤이었다. 기차에서 내리니 비가 내리고 있어서, 대충 개어놓았던 우의를 입고 숙소 City Hostel Bergen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다.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짐을 정리하니 다행히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빗줄기가 많이 약해졌다. 우의는 널어두고 홀가분한 몸으로 나왔다. 베르겐은 항구 도시로서 노르웨이에서 오슬로 다음으로 큰 도시이지만, 관광객들에게는 바닷가에 늘어서 있는 예쁜 목조 주택들로 유명하다. 그래서 감라스탄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쁜 건물들과 좁은 골목들을 기대하며 브뤼겐으로 갔다. 그러나 다소 실망스러웠다. 일단 꽤나 많은 건물들이 보수 공사 중이어서 자연스럽게 늘어진 알록달록한 주택들을 감상할 수 없었다. 특히 공사 중인 어떤 건물에는 보수 이후의 모습을 건물 크기 그대로 그려놓아 확 깼다. 브뤼겐 안으로 들어가도 보았는데, 날씨가 흐려서 그런가 그냥 목조 주택들이구나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특이한 점이 있었다면, 일부 골목들은 바닥도 나무판이었던 것이다. 바람이 부는 대로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나와 바로 옆에 있는 Bergenhus 요새로 갔다. 13세기에 지어진 요새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껏 봐왔던 요새나 성벽들과는 다르게 색깔이 무채색이었다. 주변에 있는 아무 돌이나 들고 와 다듬고 위로 쌓아 올려서 그런지 칙칙한 회색이었다. 직전에 보았던 목조 주택들과 180도 다른 분위기였다. 하긴, 전투하는 데에 색칠 놀이가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래도 나름 풀밭도 조성해 놓아서 공원 느낌이 나 바다를 보며 산책을 즐기다 내려왔다.
이날도 역시 점심을 굶었기 때문에 매우 허기가 진 상태라 뚜벅뚜벅 Fishmarket에 먹잇감을 찾으러 갔다. 여러 점포를 돌아다니며 신선한 생선 비린내를 마음껏 마셨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꽤 있는 곳에 들어가 고래 스테이크와 지역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주문받는 직원에게 '카드의 정석'을 딱 내밀었더니 한국어로 "여기에 꽂으시면 됩니다."라고 말해서 깜짝 놀랐다. 동양인이길래 중국인―이전 며칠 동안 쌓인 데이터에 통해 북유럽에 있는 동양인의 한중일 비율이 1:8:1 일 것이라 가늠했었다―이겠거니 하고 영어로 대화했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한국인을 보게 되어 너무 반가웠다. 그래도 일하시는 중이니까 "고맙습니다."라는 짧은 인사만 하고 구석에 있는 식탁에 가서 앉았다. 시장에 있는 점포다 보니 맥주는 병에 플라스틱 컵에 뒤집어져 꽂힌 채로, 음식은 일회용 종이 접시에 일회용 나무 포크와 나이프와 함께 제공되었다. 스테이크를 썰어 먹을 때 저 포크와 나이프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음식이 맛있었으면 용서가 되었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먼저 맥주는 너무 밍밍했다. 보리 맛도 홉 맛도 약하고 맥주향을 첨가한 탄산수 같았다. 고래 고기는 소고기랑 비슷한 모습이었고 질감 또한 그랬다. 하지만 맛을 음미하니 무언가 비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생선 냄새가 추가된 대신 감칠맛이 사라졌달까...? 먹을 만은 했는데, 또다시 한우에 대한 동경심만 더 강해졌다. 실망스러운 저녁 식사를 하고 한국인 직원에게 예의상 "잘 먹었습니다."라고 인사하며 나왔다.
배가 부르지 않아 마트에서 감자칩과 맥주, 그리고 내일 아침으로 먹을 빵을 사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내 도미토리로 들어갔는데, 이틀 전에 만났던 아저씨가 그 도미토리에 있었다. 시장에서 연어 회를 사 오셨는데 같이 먹자고 하셔서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팩소주도 많이 남았다고 하셔서 팩소주도 한 팩 얻어마셨다. 빈손으로 가긴 그래서 마트에서 사 온 과자랑 맥주 2캔을 챙겨 주방에 가서 진짜 저녁 식사를 했다. 노르웨이 현지 시장에서 파는 연어 회는 일품이었다. 연어 회를 두툼하게 썰어주어서 입에서 부드럽게 살살 녹으면서도 살짝 쫀득한 식감이 기가 막혔다. 오슬로 식당에서 먹은 연어 사시미 6조각과 가격은 같았지만 양도 열 배는 더 많고, 맛도 열 배는 더 맛있었다. 게다가 보름 만에 마시는 소주는 왜 이렇게 달고 부드러운지. 희석식 소주 특유의 역한 맛이 거의 안 느껴졌다. 맥주 맛도 나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선 실컷 마셨던 참이슬이 더 인상 깊었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정리하고 도미토리로 돌아왔다. 아쉬웠던 베르겐은 이 마지막 저녁 식사 하나로 만회할 수 있었다.
정오가 되자 트램을 타고 공항으로 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벌써 떠나게 되었다. 노르웨이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이렇다: 자연은 정말 예쁜데, 도시는 특색 없이 밋밋했다. 나중에 다시 오고 싶은 북유럽 국가를 하나 고르라고 하면, 송네 피오르 하나 때문에 노르웨이를 고를 것이다. 그래도 베르겐에서 좋은 추억을 하나 쌓고 갔다. 오슬로에서 만났던 아저씨를 다시 본 것. 그리고 같이 소주에 신선한 연어 회를 먹으며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군대 이야기, 연애 이야기, 직장 생활 이야기 등 아저씨가 겪었던 수많은 경험담을 듣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래, 여행은 꼭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경험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지.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여행의 일부에 불과하지 않고, 여행의 분위기를 좌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