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지하지 못한 우주의 패러다임들 01.
시간에 대해 생각하는 건,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는 빠른 열차를
하염없이 보고만 있는 것과 같다.
타려고 하면, 이미 다음 역을 지나있다.
시간에게 속고 있을까?
20대의 시간은 너무 찬란해서 버거웠다.
얼마나 귀한 시간인지 알아서 더 그렇다.
무거운 고민과 고통도 “한창 좋을 때인데 뭐-” 하며
마냥 좋아야 할 나이 같은데 좋지가 않은 날들.
막 대학을 졸업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며, 평생을 함께할 사람을 찾고, 신체적으로 건강한 출산을 이루는 데까지 단 10년의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는 좁은 나이.
그 좁은 길목은 유독 시간을 조여와 나를 조급하게 만드는 부당함이 있었다.
출근길 지각하는 날이면 마음 한 구석에 억울한 기분이 든다.
일찍 일어나면 되지 억울하긴 왜 억울해 싶지만,
단지 그 5분, 아니 2분이 아쉬워서 시계와 도로를 번갈아보는 조급함을 느낄 때면, 그 몇 분 때문에 하루 전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진다는 사실이 좀 너무하게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그 5분의 시간이라는 허상에 내가 이렇게 지배당한다니”하며 다시 시계를 초조하게 바라보곤 한다.
어쩌면 시간은 있는 것처럼 보이는 허상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사회는 정교한 시간의 틀로 우리의 등 뒤를 거세게 내몰았다.
시간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 하나요?
시간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나는 설명할 수 없다.
- 『고백록』
그 어떤 철학자나 과학자도 시간이 무엇인지 완전히 알아내지 못했다.
그저 시계가 만든 환상일까? 단지 엔트로피는 절대로 줄어들 수 없다는, 되돌릴 수 없음이 전부일까?
시간이 정말로 존재하든 아니든, 시계 아래 사는 나는, 한 가지는 명확하게 느낀다.
시간이 정말 빠르다는 것. 그런데 그보다, 아는 것보다도 항상 한 발짝 더 빠른 게 시간이다.
그것이 얼마나 거대한지, 어떤 기억도 고통도 무뎌지도록 꿀꺽 잡아먹는다.
과거는 ‘지나간 과거’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쌓이는 것에 가까웠다.
전날 잠을 설치면 다음날 눈 밑에 그늘이 지고, 평소 즐겨하는 말투와 기분은 입꼬리를 위아래로 당겨 꼿꼿하게 고정시키며,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눈빛 한 겹의 필터가 바뀐다.
시간은 외부 세계에 독립적으로 지나가지 않는다.
생명체처럼 내 안에 깃들어 몸 속에, 피부와 인상 하나하나에 새겨진다.
마치 나와 관계 맺는 존재처럼 흔적을 남긴다.
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살아있는 시간을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정말로 있는지도 모를 시간 앞에서 매번 쫓기며 초조해지고 싶지 않았다.
죽음은 모두에게 다 다르게 찾아오는데, 어떻게 모두가 동일하게 흐르는 시간을 살고 있단 말인가.
시간을 잡는 법
세 가지
어떻게 하면 시간을 붙잡을 수 있을까.
이 모호한 시간에 주도권을 쥘 수 있는 방법, 세 가지를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시간이 변증법과 닮았다는 것이다.
인식은 늘 사건보다 늦게 찾아온다.
정-반-합은 과거-현재-미래처럼 지나가는 동안에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정이 반으로 향할 때, 합은 이미 그 속에 같이 흘러온다.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는 시점이 늦을 뿐,
반대되는 개념 속에는 이미 합이 도착해 있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라는 모호한 ‘정’과 ‘반’의 충돌 속에 살지만, 미래는 이미 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 안에 숨겨진 ‘합’이 된다.
시간이 마치 진짜 존재하는 틀처럼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
현재는 ‘지금 머무는 것’
미래는 ‘도달해야 할 목표’
이렇게 되면 우리는 늘 어떤 시간에 쫓기게 된다.
남들보다 늦을까 봐, 내가 무언가를 놓칠까 봐.
특히 얄팍한 사회의 기준으로 짜인 나이별 ‘타이밍’은 이번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다음은 없다는 듯,
나만 외지에 멀어지는 듯한 초조함을 키운다.
정-반-합이 하나의 흐름으로 존재하듯, 우리의 시간도 그러하다.
과거-현재-미래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지 구분할 수 없는 감각.
지금 이 순간에도 미래는 나와 나란히 존재하고 있다는 희미한 감각을 잡을 수 있다.
그 감각에 집중하면, 시간은 더 이상 우리를 쫓아오지 않는다. 내 손에 쥐어진 언제든 오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변한다.
만약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아주 단순하게만 생각하자면,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한꺼번에 존재할 것이다.
기쁜 날, 슬픈 날, 모든 감정과 사건이 시간 없이 몰려든다면, 존재는 과부하에 휩싸여 견디지 못할 것이다.
시간은 그 뭉텅이를 조각내, 하루하루에 나누어 막아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삶이 너무 뜨거워 한 번에 들이켤 수 없기에,
오늘이라는 쓴 하루를 한 모금씩 살아내는 것.
그것이 시간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타임머신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과거-현재-미래가 직선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하이데거의 시간은 시간이 일방향이 아님을 가장 잘 보여준다.
시간이 직선이라면 나는 지나간 과거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 사이, 찰나의 현재만을 살아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시간은 오히려,
미래-과거-현재에 가깝다.
미래가 가장 먼저라니, 어째서일까?
존재는 죽음이라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선취(先取)한다.
내가 죽는다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
더 이상 타인의 방식이나 유행대로 살아갈 수 없다.
그때, 나의 가장 고유한 존재 방식을 직면하게 된다.
“이대로 살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은 과거의 나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찾아 다시 불러낸다.
되살려낸 그 가능성을 지금으로 끌어와,
불안 속에서 순간의 결단을 내리는 것.
그것이 바로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가만히 몇 초만 생각해 보면, 직선의 시간보다 순환하는 시간이 훨씬 더 체감됨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은 나의 선택에 따라 순환하고, 언제든 나에 의해 다시 쓰일 수 있는 개념이다.
불분명함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나의 시간은?
사람마다 살아온 궤도가 다르고
경험해 본 질량이 다르며,
마음의 자력이 다른데
어떻게 같은 시간 속에서 살 수 있을까?
31세에 사춘기가 와도
54세에 첫 꿈이 생겨도
62세에 사랑을 해도
91세에 아이처럼 굴어도
뭐, 어떤가?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그 시점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니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을 끌어와,
오늘의 나를 소진하지 않아도 된다.
남이 아닌 나만의 가능성을 향해, 매 순간 용기 있게 던져보는 것,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는 것이 시간에 끌리지 않는 방법이다.
인생의 속도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빠른 고속도로로 질주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느릿느릿하게 걸어갈 수도 있다.
로켓은 목적지에는 빨리 도착할지언정,
너무 빠른 나머지,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지 못한다.
온전히 경험하고 깨닫기 위해서는 천천히 걸어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내 속도'로 '내 길'을 가는 것이다.
타인의 시간표에 나를 맞출 필요가 있는가?
질문 부스러기 # 10
당신의 시간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