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이루는 무형의 작용들 05.
가끔 오류가 날 때가 있다.
무엇을 봐도 삐딱하게 느껴지고,
마음에 날이 서 있을 때.
기기는 재부팅 한 번이면 말끔히 돌아오는데,
나는 8시간을 푹 자도
24시간을 버텨내지 못한다.
어쩔수가없네
타인과 싸우는 것보다
게으름과 싸우는 게 훨씬 어렵다.
상대는 결국 나 자신이고, 이 싸움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내가 나랑 싸운 거니까, 지면 내가 이긴 거다.”
그 순환 논리에 굴복당해서, 졌는데도 이겼다고 합리화한다. 제자리에만 붙잡아두는 이 끈적한 덩굴에서 벗어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육체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노트에 빼곡히 적힐 만큼 넘쳐난다! 그러다가도, 하루 종일 먹고 자고 게을러지는 날엔 그 모든 생각이 싹 사라지는 듯하다.
생각은 식고,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에너지를 요한다.
철학이든, 예술이든, 사랑이든 갑자기 허기가 지면 생각이 흐려지고, 우울하면 세상만물이 어두워지고, 아프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원초적이고 즉각적인 몸의 리듬 앞에서
정신은 언제나 한 발 늦다.
하고 싶은 일은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늘 몸에서 결정된다니, 얼마나 부조리했는지.
육 체
인간은 ‘가능성’을 한가득 품고 살아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육체는 ‘늘 지금 여기’에 묶여있다.
본성과 관성의 궤도 안에서만 움직이는지도 모른다.
내 인생의 가능성을 알아봐 줄 사람이 저 먼 아르헨티나에 살고 있을 수도 있지만, 나의 육체는 당장 이 방을 벗어날 수 없다. 무한한 경우의 수를 탐험하고 싶어도, 결국 나의 경험은 발 닿는 곳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하물며 이 육체는 피로하고 병들며, 쉽게 냄새를 풍긴다. 한 걸음을 옮기는 데에도 의지뿐 아니라, 에너지가 필요한 연약한 존재다.
우주에 대해 사유하다가도 배가 고프면 일단 라면부터 끓여야 하는 것이다.
정 신
육체는 감옥이다. 시간, 공간, 중력, 질병, 죽음 사사건건 제약을 걸어 가둔다.
의식은 그 제한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이처럼 훌쩍 넘어선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물리법칙이 깨진 세계를, 죽음 이후를, 신을, 육체가 없는 나를 그 와중에도 떠올린다.
이 해맑은 상상력이 있다는 건 슬픈 일이다.
상상력은 분주하다. 시간을 초월한 다음, 미래를 예측하고 과거를 다시 바라보고, 오지 않은 세계를 지금으로 당겨와 끊임없는 시물레이션을 돌리느라 애쓴다.
‘더 나은 나’, ‘더 나은 세상’을 계속해서 꿈꾸게 만들어 기대하게 하고 불안하게 만드는 희망이자, 영원한 결핍이다.
그 결핍을 시로 만들고, 한계를 예술로 승화시켜 의미를 만들어내기까지 하니 얼마나 간절한가.
인간은 가능성과 한계 사이에서 질문하고 반문하고
좌절하고 표현하는 존재일 터.
인생은 “더 나아가고 싶어. 그런데 지금은 못 가.”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다.
너네 어떻게 타협할래?
이 육체와 정신, 끝없이 대물림되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기분은
탐험가의 꿈을 안고 드넓은 바다를 항해하지만
낡고 느린 배로 이동해야만 하는 느낌이다.
광활한 지도가 손에 있지만 반대손에는 작고 녹슨 나침반을 쥐고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육체, 내 세대에서 시작된 게 아닌 정신적 상처들, 트라우마, 시간, 무의식...
어디서 시작된 지도 모를 굴레를 떠다니는 바다에서
“이게 전부일 리 없어” 하는 감각.
그런데, 그 둘의 타협은 불가능하다.
육체는 결코 우리에게 '영원한 건강'이나 '무한한 시간'을 양보하지 않는다.
'타협'은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포기하는 것인데, 육체는 항상 늙고, 병들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최종 결론을 통보할 뿐이다.
정신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왜 얘는 아무 양보 없이, 내 삶 전체의 방향을 뒤엎는데? “
“나를 죽게 만드는 건, 결국 몸이잖아.”
그럼 육체는 답한다.
“넌 스스로를 너무 많이 속이잖아. 괜찮다고 버틸 수 있다고, 의미가 있을 거라고.
난 그저 ‘아니다, 너무 아파. 너 지금 숨 막혀. 이건 계속 못 가.‘라고 어떤 가면도, 거짓말도 없이 알려줄 뿐.”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가, 끝까지 사실만을 말하는 —
가끔 너무 늦고, 잔인하게 직설적이라 짜증 나기까지 한 육체를 영원히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정신은 물러서지 않고 내 세상의 경계를 정한다. 느리고 무거운 육체를 끌고 가는 주도권이 있다.
타협이 안 된다면, 직조는 할 수 있다.
육체는 공허하고
정신은 맹목적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
- 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이 문장은, 감성과 지성의 균형 없이는 인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호하게 말해준다.
물자체를 시공간 형식으로 정리하는 감성과 지성의 판단의 구조가 있어야지만,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
이 말은 어려워 보이지만 쉽게 말하면 이렇다.
우리 밖에 있는 세상은 너무 복잡한 감각의 덩어리다. 이 사물의 진짜 본질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세상을 정리하는 능력 두 가지가 있다.
복잡한 감각을 시간과 공간에 넣어주는 감성, 그 정보를 개념으로 정리하는 지성.
칸트는 이 두 능력이 균형 있게 작동해야만 비로소 우리가 세상을 인식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감각 없는 생각은 텅 비어있고, 형식 없는 감각은 아무 의미도 없다.
칸트는 인식을 정신의 구조로 말했지만, 나는 이 문장을 볼 때마다 육체와 정신의 관계가 떠오른다.
정신만 있으면 혼란스러운 덩어리,
육체만 있으면 비어있는 껍질.
그러니, 직조할 수 있다.
정신은 실의 방향을 제시한다.
가끔 너무 멀리 가고, 무늬를 욕심내고, 미래의 패턴을 상상하며.
육체는 그걸 당겨오고, 엮고, 질감을 만든다. 때로는 끊어지고, 매듭이 생기고, 거칠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둘이 서로 조금씩 다른 속도로 움직이다가
어느 날, 아무도 설계하지 않은 문양이 생기기도 한다.
나는 정신과 육체의 결이 엮여 매일 조금씩 짜여진다.
뜯고, 풀고, 다시 짜며 살아간다.
완벽하지 않고,
실수도 있고,
풀렸다 다시 엮이기도 하지만
오로지 나만 짤 수 있는 감촉.
내가 세상을 어떻게 감각하고,
그걸 어떻게 그려내고,
거기서 무엇을 더할 수 있느냐가
‘나‘라는 직물의 크기를 만든다.
질문 부스러기 # 9
요즘 가장 많이 엉키는 실,
혹은 너무 가늘어서 끊어질까 봐 조심스러운 실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