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이루는 무형의 작용들 04.
언 어 는 항 상 구 멍 이 있 다.
시대를 타지 않는 것?
연휴를 쇼팽 콩쿠르와 함께 보냈다.
19세기 초 폴란드의 한 청년이 남긴 음악이 2025년의 누군가를 뜨겁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는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어떤 본질이 응축되어 있다.
다른 시대에 태어나 같은 감정으로 감응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자체만으로 충만해진다.
매번 흥미로운 점은 같은 악보라도 누가 연주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음악으로 들린다는 것이다. 마치 악보가 연주자의 존재를 해석하듯, 온몸을 내맡긴다.
나는 음악에 잠식된 사람이다.
그중에서도 클래식 음악이 그 무엇보다 좋다.
세상은 참 일관되게 유행은 빠르게 소비되고, 사람들은 쉽게 잊고, 대중은 금방 식는다.
그런 세상에서 수백 년이 지나도 감정을 울리는 힘,
반복해도 늘 새로운 의미를 품는 클래식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음악을 꿋꿋하게 지켜낸 그 당시의 진심이 좋았다.
시대라는 것은 칼로 자르듯 단절되는 게 아니라, 사고방식이 바뀔 때 어느새 자연스레 도래한다. 그 흐름 속에서 유행을 타지 않고 언젠가 다시 돌아보게 되는 근원적인 가치가 있다.
그래서 나는 클래식을 사랑하게 되었다.
( )라는 감정
음악을 튼 것보다 틀지 않았을 때 더 신경 쓰인다.
음악을 틀면 “이걸 듣기 위해 태어났구나. 듣기 위해서라도 더 살아야겠다.“ 생각한다.
도대체 음악이 뭐길래 내 일상의 전부가 된 걸까?
생각해 보면, 그 시작에는 언어가 있었다.
글을 잘 쓰는 건, 나름의 정답이 있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생각을 규칙에 맞게 배열하고, 논리의 구조로 정교하게 짜내는 능력이다.
그렇게 틀이 생기고, 내 생각은 틀 밖으로 넘쳐흐른다.
생각을 완벽히 옮기려다 보면, 한 문장 안에서도 수십 가지 경우의 수가 갈라지는 게 보인다. 그래서 ‘딱 맞는 한 문장’을 고르는 일은 내겐 늘 어렵고, 감정을 언어로 번역하는 일기는 그 무엇보다 고된 작업이다.
그 순간은 너무 좋았다. 황홀하다고 느껴질 만큼.
그런데 좋지가 않다. 약간 불편하다.
그렇다고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게 아니다.
좋은데 좋지가 않다. 행복한 동시에 허무하고 찝찝하다. 그러면서 따뜻하다.
이 미련 없이 불쾌하고 따뜻한 지점 때문에
‘아쉽다’라는 세 글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일기는 이렇게 궤변이 된다. 실은 이보다 몇 배로 혼란스럽다.
‘좋았다’고 쓰기엔 끝에서 약간 불쾌하고,
‘불편했다’고 하기엔 너무 따뜻하다.
‘행복했다’고 해도 거짓말이고,
‘허무하다’고 하면 허무한 게 아니다.
모순된 감정들이 뒤섞인 이 애매하고 다층적인 감정을 흐름 그대로 온전히 전달하고 싶었다.
그런데 언어로 옮겨 적는 순간, 감정은 다른 것으로 굳혀진다.
가려운 곳이 있는데 그 주변을 긁는다고 해서 시원해지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 구멍을 지나치지 못한다.
음악은 언어가 흘려버린 것들을 붙잡았다.
따로 번역이 필요 없고, 국경과 종교, 시대를 넘어
말없이 ‘말소리’를 전달했다.
먼 미래에 머리에 칩을 심어 외국인과 소통하면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그 언어는 내가 쓰는 언어가 아니지만, 알아들을 수 있다.
그저 마음에 ‘착’하고 붙는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심란한 기분을 묻는다면
라흐마니노프 콘체르토 2번을,
사랑의 두근거림을 기록한다면
슈만 콘체르토 3악장을,
작별에 대한 일기를 쓴다면
말러심포니 5번의 4악장을 그대로 옮길 것이다.
인생과 수상하게 닮아있는
음악 없는 영화를 상상할 수 없다.
음악은 이 장면을 어떤 감정으로 읽어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느끼게 만든다.
같은 웃는 장면이라도, 어떤 음악을 얹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가 된다. 발랄한 음악이면 코미디, 불협화음이면 호러다.
‘소리’라는 공기의 진동이 공간을 울리고, 고막을 흔들어 신경을 타고 뇌에 도달한다.
단순한 진동일 뿐인 그것이, 언어를 거치지 않고도 무의식에 말을 건다. 호르몬을 분비시키고, 명상에 이르게 한다. 음악에 기억을 저장하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며 영혼을 구원하기까지 한다.
왜 장조(major)는 희망을, 단조(minor)는 슬픔을 느끼게 할까?
아마도 그 음계가 감정을 가장 본능적으로 드러낼 때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장조는 웃음소리의 밝고 경쾌한 도약을, 단조는 흐느낌 속에 스며 있는 반음의 떨림과 비슷하다.
음악은 인생과 닮았다.
태동이라는 리듬으로 시작해, 심장은 박자를 치고,
걸음걸이로 템포를 정하며
호흡으로 프레이징을 만드는.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로 이미 하나의 곡이 된다.
Jazz와 삶
인간이 곡이라면, 삶에서 벌어지는 관계와 갈등은 화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불협화음은 듣기 거북한 충돌이지만, 그 위에 어떤 단 하나의 음만 얹으면 불협은 조화로 바뀐다.
메이저 코드에 반음 한 음을 더 얹으면 7 코드다.
조금만 다른 관점이 얹히면 갈등도 조화로 바뀔 수 있다는 긴장과 해소의 코드.
완전한 안정이 아니라, 불완전한 감정의 중간에 머무는 그 상태는 그 어떤 화음보다 감미롭다.
재즈는 그런 코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과 변주로 가득한, 실패조차 음악이 되는 세계.
삶이 원래 그렇듯— 틀렸다고 믿은 순간조차, 새로운 해석이 되어 흐른다.
우리는 자주 잊어버린다.
인생의 클라이맥스와 음악의 클라이맥스는 둘 다 순간의 정점에서 울림을 터뜨리지만,
그 순간을 진짜로 울리게 하는 건, 순간을 기다린 마음, 그리고 그 전의 불협, 그 후의 여운이라는 사실을.
인간과 음악 사이
우리는 음악 없이 살 수 없다.
동시에 음악은 인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 입으로 불러주고, 손끝으로 연주해 주고 귀로 들어주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
음악은 인간의 유한성을 함께 살아낸다.
순간인 동시에 여운으로 남아, 살아있는 동안 쭉 함께하는 존재.
음악은 인간의 감정을 먹고 자라나고, 인간은 음악을 통해 감정을 확장한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것에 길들여지고, 감정을 내어주며 함께 소멸된다.
인간이 없으면 사라지지만, 인간을 살아있게 만드는 공생체다.
음악은 수학으로부터 왔고, 수학은 우주의 언어다.
작곡가는 ‘영감’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그 영감의 출처는 탄소 기반이 아닌, 물리적 형체조차 없는 무언가일 것이다.
인간이 아직 외계인을 만나지 못한 이유—
어쩌면 음악이 바로 그 외계인이기 때문은 아닌지.
질문 부스러기 # 8
요즘 당신과 가장 많이 공생하는 음악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