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자력을 갖는 일

인간을 이루는 무형의 작용들 03.

by 슴순
어릴 때 자석으로 자주 하던 놀이가 있다.
N극과 S극을 끝까지 붙지 않게
가까이 가져가기,
N극과 N극을 내 힘으로 억지로 붙여보기.
어린 손가락에 힘을 잔뜩 주고 몇 번을 시도해도
다른 극을 붙지 않게 가까이 가져갈 순 없었고,
같은 극을 억지로 평행하게 둘 수 없었다.

손가락이 다 자라고 나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내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어린 날의 같은 힘을 느낀다.


마음은 어디일까?


마음을 다쳤다고 심장외과에 갈 수는 없다.

마음이 미어지는 날엔 수없이 나를 애먹인 식욕도 사라지고, 마음이 들뜨면 밤을 새워도 버틴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마음이 멀어지면 외롭다. 마음에 먼저 들어야 머리에서 실행으로 옮기고, 머리는 아니라고 하는데 마음에 끌린다. 장기도 아닌 것이 그 어떤 장기보다 나를 소화한다.


인간은 마음 안에 무언가를 품고 산다.

살면서 분명하게 느낀 한 가지는, 그걸 잘 관리해 줘야 한다는 거다.

분명히 힘든 일이 있었는데도 이상하리 만큼 덤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게 큰일은 아니었나?” 싶지만, 그건 마음이 닳고 닳아서 뾰족한 아픔을 느끼지 못할 때였다.

슬픔을 온전히 느끼는 건 지독하게 아파서 견디기 싫지만, 나에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마음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니까 말이다.

그럼 행복을 느낄 때도 좀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겠지.



마음에 무엇을 품은 걸까?



나는 내가 조금도 예민한 편인지 몰랐다. 잠귀가 밝거나, 날씨에 영향을 크게 받는다거나 소리에 바로 반응하는 종류의 예민함이 아니었기에, 꽤 오래 스스로를 둔감한 편이라고 알고 있었다.

어릴 땐 B형은 낙천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특징을 보고 "나름 비슷한 것 같네."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혈액이 어떻게 성격을 정할 수 있겠는가.

커가면서 나는 내가 마냥 낙천적이지 않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mbti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성격을 또렷하게 다 담으려면 inxx-ahwxkzloy 정도는 돼야 할 것 같았다.

검사지나 캐릭터 특징과 다르게 나는 주변을 많이 의식했고 매사 눈치를 보았으며, 말 한마디에 자주 허둥댔다.

허둥댈 때마다 나오는 매스꺼움을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주변에 영향을 받는가?’

이 질문이 이 글의 시작이자, 마음속 무언가를 깊게 파고들게 된 이유였다.

그러다 나는 명확한 한 가지를 발견했다.


마음에는 자력이 있다. ‘끌린다’라고 표현하듯이 대상을 이끄는 중력 같은 힘이 있다.

어떤 사람은 비극에 끌리고, 어떤 사람은 해피엔딩만 골라 당기고. 누구는 지나간 일에 자꾸 닿고, 누구는 앞만 보고 나아간다. 돌잡이 때 손에 닿은 곳처럼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끌리는 세계가 있다.

그 자력이 가리키는 나침반은 앞으로 인생의 방향을 보여준다. 놀랍게도 그 바늘은 침묵 속에서도 가리키는 방향이 있고, 다른 사람의 소리에 흔들려도 끝내 한 방향으로 돌아온다.



취향이란?



자력의 세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옆에 있기만 해도 피곤한 사람이 있는 반면, 말수가 적은데도 존재만으로 강하게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공간에 들어서면 특유의 기류가 느껴지는 사람.

그 차이는 얼마나 자기 자신과 정렬되어 있는지에 있다.

마음이 제멋대로인 사람은 방향 없는 전류처럼 파장을 잃는다. 강한 자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자기

자신을 향해 먼저 정렬되어야 한다.

자력이 강한 사람은 내면에 묵직한 중심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세상의 말이나 지나가는 유행보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더 깊이 신뢰하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단단한 자기 확신은 고유의 파장을 만든다. 그래서 말투와 옷차림, 서 있는 자세, 손에 쥔 작은 물건 하나하나에서 그 사람을 들여다볼 수 있다. 정렬된 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많은 곳을 다니지 않아도 주변을 자기 쪽으로 당긴다.


이 마음의 자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영역 중 하나가 바로, 복제다. 창작자라면 누구나 맞닥뜨리는 질문, ‘원조와 복제는 무엇이 다른가?’

카피는 정체성이라는 거대한 것을 훔쳐가지만, 그 도둑질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이디어의 모방, 응용, 불쾌한 응용, 교묘한 카피까지 어디서부터가 괘씸한 단계인지 기준조차 모호해서 더 감정이 복잡하고 타격이 클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AI가 발달한 지금은 복제가 더 쉬워졌다. 때로는 가짜가 원작보다 더 견고하고, 먼저 주목받는다. 앞으로는 더 쉽고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 차이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확연한 지점이 이 ‘자력’에 있다.

무언가를 만들어 낼 때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어떻게 떠올렸는가’ 보다 ‘왜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가’이다.

어쩌다 그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왜 이것을 만들고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에 대한 명확한 최초의 지점이 있다.

포장지보다 의도, 트렌드보다 심도, 형식보다 왜가 중요한 이유다.

진심에서 비롯된 감응은 베껴지지 않는다. 진정으로 깊이 사유하고 오래 앓아봤다면 타인의 생각을 제 것인 양 쉽게 가져가지도 못한다. 그것이 그저 생겨난 것이 아니라, 버틴 시간, 몸소 겪은 경험, 그리고 마침내 가장 적합한 언어로 번역하는 오랜 고뇌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취향과 언어, 세계관이 빈약할 때, 복제의 힘을 빌린다.


자력의 힘은 남들이 무엇을 좋아할까 보다 내가 이걸 만들지 않으면 안 될 이유에서 시작된다. 그 심도 깊은 시작점은 명확한 나침반의 방향을 가리킨다. 그렇기에 복제가 더 빠른 성공을 이룬다 하더라도 방향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둘은 세상을 보는 밀도해상도가 다르다. 같은 해상도를 가진 사람은 그것을 단번에 알아볼 것이다.


보이지 않는 힘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면, 진정성을 지닌 자력은 밖으로 퍼져나가 주변과 공명하고 증폭된다. 그 힘은 집회나 콘서트에서 수만 명이 한 목소리로 외치는 순간처럼 강렬하다. 아무 말 없이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달라지고, 벅차오르는 에너지가 몸을 감싸는 경이로운 느낌이 든다.


우리는 매일 중력에 맞서 상반신을 일으키고, 물건을 옮기며 하루를 저항한다. 그럴 때 누군가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가 지친 무거운 몸을 ‘쌀 한 톨’처럼 들게 만들곤 한다. 무게는 변하지 않았는데, 내 마음의 상태가 현실의 감각을 바꾼다.

나의 방에 쌓인 사소한 취향들, 함께한 사람들의

기억은 언제나 나를 흔들리지 않도록 부축하고 있었다.


영화 『쇼생크 탈출』 중, 이런 장면이 있다.

앤디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을 감옥 전체에 틀었다는 이유로 2주 동안 독방에 갇힌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좁은 독방에서 나온 후, 죄수들과 처음 나누는 대사다.

“독방에서 2주를 어떻게 버텼냐고, 앤디? 일주일이 일 년 같을 텐데.”

“모차르트가 함께 있었지. “

“독방에 턴테이블을 갖고 들어가게 해 줬단 말이야?”

“아니, 이 안에 음악이 있었지. 이 안에도.(머리와 가슴을 가리키며) 그게 음악의 아름다움이야. 그건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거든.
세상에는 이렇게 돌덩이로 만들어진 것만 있지 않다는 걸 잊지. 마음속의 그건 아무도 뺏지 못하고 손댈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야. “


아무도 뺏어갈 수 없는 마음만의 측음기,

점호를 해도 방을 뒤져도 뺏어갈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을 볼 수 없으니 타인에게 흔들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는 걸 기대하기는 어렵다.

내가 원하는 유토피아는 세상에 없을뿐더러, 당장 내일의 나 또한 약속된 존재가 아니다.

흔들리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나는, 내 세계부터 채우려 한다. 좋아하는 것을 읽고, 음악을 틀고,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고, 한 바퀴 걸어도 본다.


‘나의 세계관’에서 주도권을 잡는 것.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을 개는 사소하고 작은 행동부터 시작한 그 세계는, 타인의 시선이 스칠 수는 있어도

침범할 수는 없다.



질문 부스러기 # 8


당신은 요즘 어디에 끌리고 있나요?

세상의 소음이 사라진다면,

당신 안에서 어떤 소리가 들릴까요?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