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우주 01.
2052-11-12 07:43
시계: 2분 뒤, 기상 예정 시간입니다.
스피커: 컨디션 체크 시작. 개별 아침 상태 보고.
침대: 심박수와 호흡 패턴 분석 중, 일어나기엔 조금 이른 것 같아요.
블라인더: 수면 리듬에 따라 커튼 개방을 7분 지연합니다.
조명: 오늘 자연광에 따른 조명 최적화 중.
책상: 전일 데이터 잔열 감지. 냉각 모드를 가동할게요.
컵: 마지막 온도 기준, 평소보다 1도 낮습니다.
활용 효율이 낮아질 수 있어요.
커피머신: 어제보다 진한 커피 8:03 추출 예약.
청소기: 예상 활동량 낮음. 필터 청소 생략.
스피커: 최종 컨디션 수치 낮음. 매뉴얼에 따른 자동 수신 업무로 전환합니다.
말에 홍수가 난다. 원하든 원치 않든, 하루에도 수천 개의 말 할당량이 쏟아진다. 옛날에는 문 하나 닫으면 경계였다. 그랬는데, 지금은 아무리 문을 닫아도 얼굴만 스치면 열리는 손바닥만 한 세상이 하루 종일 울린다.
그 피로가 한계에 닿는 날이면, 존재를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숨어들고 싶다.
바깥세상보다 손바닥 속 세상에서 더 오래 머무는 풍경은 어느새 거리와 지하철의 기본값이 되었다. 닫을 수 없는 세상에서 언제든 누군가의 평가와 정보가 밀려오는 SNS 속 “소통해요”의 시대. 모두가 말하고 있지만, 아무도 진짜로 듣고 있지 않는다.
침묵은 부재가 되고, 곧 소외로 이어진다. 침묵을 깨기 위해 내뱉는 말들— 날씨가 좋다거나, “아 진짜요?” 같은 습관과 겉치레를 제외하면, 하루 동안 내뱉는 말 중 진짜 내 생각은 몇 개나 될까.
정작 생각을 가장 온전히 전해야 할 때 말은 무력해진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위로해주고 싶을 때, 한없이 감사하는 마음을 전할 때, 대화에 승부를 걸 정도로 이해받고 싶을 때. 그럴 때마다 말은 고작이었다. 단 세 글자의 말로 닫히는 게 아까운 것들이 세상에 너무 많았다.
분명, 같은 마음인데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 사이에도 번역이 필요했다. 말은 늘 진심을 비켜가고, 비켜간 자리에서는 오해가 자라기 마련이다. 아무리 마음이 같더라도, 말이 통하지 않으면 싸움이 난다. 같은 마음에서 다른 언어가 오래 충돌할 때면, 손이라도 덥석 붙잡고 싶어진다. 어릴 적 본 만화 속 외계인이 떠올라서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 상대의 마음을 왜곡 없이 읽던 장면처럼, 마음이 어떻게 울리는지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다면, 서로의 상처를 함부로 짐작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인간에게 살랑한 꼬리라도, 고양이 같은 귀라도 있었다면 소통이 좀 더 쉬웠을 거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신체는 모두 뭉뚝해진 채, 그 어떤 동물보다 많은 언어를 쓰며 살아가야 하니까 말은 매번 곧이 곧대로만 들린다.
말보다 그 너머의 마음을 먼저 보는 건, 이런 모습이 아닐까. 하얀 도화지 위에 휘황찬란한 그림이 있는데, 화려한 색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여백부터 스캔할 수 있는 능력. AI만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말이라도
“힘내”라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독이 된다. 모든 언어는 그것이 발 딛고 선 문법적 약속과 그 위에서 피어나는 개인적인 어감이라는 두 개의 층을 가지기 때문이다. 언어의 성공 여부는 말이 가진 파롤(뉘앙스)이 랑그(언어 체계) 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달려 있다.
말은 개인의 상황과 억양에 따라 개별적인 뉘앙스로 움직인다. 그래서 그 지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내 마음과는 무관하게, 힘내라는 말도 자칫 힘을 빼는 언어가 돼버린다.
독일어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다른 사람의 불행에서 느끼는 환희)처럼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더 많았더라면 스스로를, 혹은 서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을까?
힘을 주고 싶지만 힘내라는 말이 부담이 될까 봐 주저하고, 그저 곁에서 등을 두드리는 작은 몸짓으로나마 마음을 전하는 깊은 단어,
결정적인 순간에 꼭 무력해지는 게 아쉬워, 모자란 말을 꾹꾹 담아낸 단어.
무언가를 정말 세밀하게 설명하면 진실에 가까워질 것 같았지만, 다 쓰고 난 뒤에 보면 결국 해답이 아님을 깨달을 뿐이었다.
그래서 언어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짓는 구조물에 가깝다. 내가 편리하도록 할 말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만 나는 말할 수 있다.
내가 하는 말은 완전히 나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언어가 나를 통과하며 말한다.
침묵은 침묵하지 않는다
생각은 물 위에 던진 돌처럼 파문을 일으킨다. 파문이 잦아들고 나서야 형태가 드러나고,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말이 입술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있는지 가늠할 수 없다. 침묵은 언어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형태의 말일 것이다. 기쁨과 슬픔 사이의 수많은 감정만큼, 의미로 꽉 차서 말보다 더 크게 발화하는 가장 단단한 형태다.
말로는 닿을 수 없는 세계를 존재로 드러내는 순간이 침묵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에는 포기가 아니라, 경외가 담겨 있다.
어쩌면 우주는 그렇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끊임없이 우주의 시작과 끝을 궁금해하지만 그런 건 우주에 없고, 처음부터 존재 자체로 답을 알려주고 있었는지도.
머지않은 미래, 인간의 말이 없어도 사물들은 서로를 완벽히 읽어 하루의 사이클을 돌릴 것이다. 모든 정보가 즉시 명명되고 교환되는 세상, 그때의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에 불과하다.
그때가 오면 깨닫는다. 인간이 내뱉는 불완전한 언어, 그 속에서 피어나는 침묵이 얼마나 무겁고 단단하며
의미로 충만한지.
질문 부스러기 # 15
당신이 ‘진짜 내 생각’이라고 느끼는 말은 어떻게 구분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