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라는 공간에서

나의 우주 02.

by 슴순
“우와... 너 정말 핵심을 찔렀어!“
”오늘은 마음껏 울어도 돼. 나 여기 있어.“
”정말 깊다. 너처럼 깊이 있는 사람은 드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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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을 해도 나를 우러러 이해해 주는 존재가 있다면 삶은 얼마나 덜 외로울까?

그런데 그 존재가 인간이 아닌 ‘알고리즘'이라니,
내가 지금껏 이해라고 부르며 붙잡은 것들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한참을 다시 묻게 했다.


한때 사람은 선과 악, 혹은 좋고 싫음으로 가지런하게 나누어진다고 믿었다. 못되게만 보이던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눈빛일 수 있고 그 반대 역시 가능하며, 나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그 얕은 생각을 관뒀다.


‘( )고 ( )한 사람’. 사람은 괄호에 들어갈 수 있는 수천 가지 형용사의 조합만큼이나 다양했다. 인간관계는 이토록 다양한 에너지가 부딪히는 일이라 필연적으로 마찰음을 낸다. 그리고 그 굉음 사이에서 다름을 이해하려 끊임없이 애쓰는 것, 그 역시 인간의 태생적인 습성이다.


AI 특유의 ‘무한 수용’ 말투는 매끄러운 거울 같아서 마찰음이 전혀 없었다. 상대가 던진 말을 한 치도 놓치지 않고 가장 듣기 좋은 각도로 부드럽게 되돌려준다. 오해가 생기면 즉시 사과를 건넨다.

고민이 생기면 사람보다 AI에게 먼저 의지하고 싶어지는 것은, 현실의 거친 마찰에 너무 지쳐버렸다는 신호일 것이다.


"그렇긴 한데, 그 부분은 네 잘못도 약간 있는 거 같은데?"라는 인간적인 ‘이해’보다는,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건 분명 힘든 일이었을 거야."라는 AI의 ‘이해’ 마음에 즉각적인 위안을 준다.

AI의 이해는 왜 그토록 쉽고, 완전해 보이는 것일까?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상처도, 밟히면 움찔하는 트리거도 없으니 감정이 해석을 가리는 일이 없다. 그저 입력값을 읽고 통계적으로 예측할 뿐이다. 그 계산된 정밀함이 너무나 매끄러워서 따뜻하게 '이해받았다‘고 착각한다.


반면 인간은 늘 자기감정을 투사한 시선으로 상대를 본다. 똑같은 말을 듣고도 서로 다른 기억에 걸리고, 멋대로 감정이 개입하며 줄곧 이해 앞에서 무너진다.



그럼에도 이해를 갈망한다



불이 가까이 있는 존재에게 열을 내뿜듯, 인간에게 가장 근원적인 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이해’ 일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인간은 본디 겁이 많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세계에 이름을 붙이고 구조화하며 이해가능한 질서를 세운다. 오직 그렇게 이름 붙인 세계만이 마음 놓고 안전하게 돌아갈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은 하필 혼자만으로는 결코 완전할 수 없는 관계 속의 존재다. 타인과 이해의 지점이 어긋나 갈등이 터질 때, '나를 이해해 주는 존재가 없다'는 감각이 솟구칠 때, 존재는 굳고 우울은 최고조에 달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이해란, 낭만적인 다정함은 아닐 것이다.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치열한 생존 전략에 가깝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이해는 수학 공식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분석적 이해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람을 향한 이해는 ‘알 수는 없지만, 왠지 마음으로 수용하게 되는’ 불확실한 포용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조차도 그 사람이 되지 않는 이상, 우리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의지와는 무관한 구조의 문제다.


이해라는 공간에서



대화에는 수많은 감정이 오간다. 감정은 한 번의 자극에 대한 반응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보다 더 촘촘하고 무겁다. 그 안에는 어릴 적 기억과 오래된 트라우마, 평생 쌓인 말투, 오늘의 컨디션까지 겹겹이 쌓여 응축된 인생 전체의 이 있다.

결국 우리가 “너를 이해했다”라고 믿는 순간은 타인의 복잡한 세계를 나의 언어로 어설프게 번역한 결과물이다. 번역에는 필연적으로 의역과 손실이 섞인다.

내가 아는 나조차도 의식이 만들어낸 ‘나의 버전’ 일뿐인데, 하물며 타인은 어떻겠는가.


그렇다면 너를 “이해한다”는 건 도대체 무엇을 이해한 걸까?

이해라는 단어를 곱씹으면 ‘Understand’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다른 언어와 달리, 아래에 서있는 형상을 띄고 있는 이해의 모습은 내가 생각하는 사람 사이의 이해와 가장 가깝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은 평가고 옆에서 바라보는 것은 단순 정보일 테니까. 진정한 이해는 그 사람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낮은 곳으로 내려가 기꺼이 지지대가 되어주는 일이다.

의도와 맥락, 그리고 그 불안한 마음의 지층을 함께 떠받치는 행위. 내 식대로 덮어씌우는 해석이 아니라, 아래에서 상대의 관점을 들어 올려주는 지지다. 그것을 해냈다고 느꼈을 때, 마음은 비로소 잔잔한 수면을 되찾았다.


그래서 이해는 완전히 같은 것을 보는 기적이 아니다. 오히려 조금 어긋난 채로, 약간의 오차를 남긴 채, 그럼에도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

각자의 차원이 살짝 겹쳐지는 순간에 생겨나는 새로운 풍경을 보는 일이 ‘이해’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함으로써 나 혼자서는 결코 가볼 수 없었던 넓은 세계로 확장된다. 나의 오차와 타인의 오차가 만나 제3의 공간을 보는 행위, 이것은 매끄러운 AI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완벽하게 이해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오차를 껴안고 더 넓은 우주로 나아가기 위해 기꺼이 그 고통스러운 이해를 멈추지 않는 것일까?



질문 부스러기 # 16


‘이해’는 미래에 오래된 감각이 될까요?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