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것은

나의 우주 04.

by 슴순
사람은 ‘ㅁ’ 위에 서 있다.
네모는 집, 틀, 구조, 머물 수 있는 공간.
몸이 있고 형태가 있고,
어디 있는지 보이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이는.

사랑은 ‘ㅇ’ 위에 서 있다.
원은 공백, 무게 없는 기호, 모서리 없이 흔들리는 것.
가득 채워도 새어 나가고,
비어 있어도 모양을 유지하는.

사람은 현실에 닿아 있는데
사랑은 공중에 떠 있다.
그래서 사랑을 말할 때마다 묻게 된다.

이게 사랑이야, 아니야?


글자보다 뜻이 뒤늦게 따라온다. 처음 본 만원이 그렇듯이. 마트에 붙어 있던 0이 네 개 붙은 숫자, 자주 보니 익숙한데 그건 대체 얼마나 큰 것이고, 얼마나 비싼 수 일까? 그 ‘만원’이라는 크기는 엄마 손을 놓고 마트에 가게 되면서 점차 이해하게 되지만, 여전히 뜻이 따라오지 않은 단어도 여럿 있다.


사랑은 무엇이며 무엇을 사랑이라고 부를까?


인간은 대대로 이어진 사랑을 품고 세상에 나온다. 처음 사랑을 듣는 갓난아기에게 그것은 자신과 세상을 이어주는 애착의 소리일 것이다. “사랑해”를 서툴게 말할 줄 알게 되면, “해-” 하고 발음할 때 입꼬리를 당기는 애교로, 뒤이어 칭찬을 끌어오는 인사말로 안착한다.


그랬던 “사랑해”는 머리가 커질수록 말하기 어려워진다. 말하기 전에 입술에서부터 무게가 느껴지는 단어다.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구조인지, 어떤 현상인지, 어떤 책임과 취약성을 품고 있는지 모른 채 소리로 먼저 배워서일까?



사랑? 그것은



내가 처음 사랑에 내린 정의는 ‘호사‘였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 호사는 오래도록 할머니로부터 배운 단어다. 나라는 이유만으로 푸짐하게 주어지던 무한한 안온함. 거기에는 고생이 더 이상 고생이 아니게 되는 지점이 있었고, 존재 자체가 환대가 되는 기적이 있었다. 그건 분명하도록 사랑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사랑은 ‘호사’라고 당당히 답했다. 나를 더 쓰고도 줄었다고 느끼지 않는 상태. 상대를 위해 양껏 해줄 수 있음에 도리어 내가 누렸다고 생각되는 것.


반대로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돌아온 대답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희생’, 두 번째는 ‘헌신’. 희생, 헌신? 그 단어에는 내가 상대보다 아래로 들어가 있다는 모양이 보여서 늘 의아하게 들렸다.

무엇을 포기했는지, 얼마나 참았는지, 다른 선택지가 있었음이 모두 기억된 말 같았으니까. 사랑이 희생이라는 단어로 나오기 전에 호사로 발음될 수 있어야 사랑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사랑,

.

.

.

호사일까?


인간은 신처럼 사랑할 수 없었다. 그제야 알았다. 할머니의 사랑은 신과 같은 사랑임을. 연인 간의 사랑은 아가페적인 내리사랑과는 다른 맛이었다. 달기만 한 사탕 같아 보여서 입에 넣었는데 지독하게 쓴 경우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단맛이야. 호사야.” 하고 스스로를 속일 수는 없다. 그게 나쁜 사랑이라 쓴맛이 난 것도 아니다. 진심을 다할수록 쓴맛은 함께 왔다.


분명 사랑인데 호사라고 부를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사랑은 나를 기쁘게 하는 동시에 나를 위태롭게 만드는 지점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랑이 무엇인지 한참을 또 헤매야 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면,
왜 사랑하는 걸까?



자신의 몸에 갇힌 인간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지, 혼자서는 증명도 체감도 할 수 없다. 사랑은 그 고독한 경계를 넘어선다. 사랑할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벗어난 행동을 하고,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말하고 쓰다듬고 안아도 타인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사랑은 이 불가능한 겹침을 마치

‘가능한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 위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너는 나야” 같은 환상까지 갖게 만드니 말이다.


불확실한 세상을 사는 우리는 모순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정리하는데 익숙하다. 이쪽인지 저쪽인지, 옳은지 틀린지, 남는 게 맞는지 떠나는 게 맞는지.

그런데 오직 사랑만이 반대다.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자며 튀어나오는 것이 사랑이다.

모순이 해결된 뒤에 찾아오는 게 아니라, 모순을 그대로 품은 채 유지된다. 모든 이성을 듣고도 그중 하나를 어기기로 선택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다.


죽음이 삶의 바깥에 있지만 삶이 죽음을 품으려는 시도를 계속하듯이, 사랑은 내가 생각하는 그 무엇보다 항상 더 큰 것이다. 다섯 조각난 사람의 손으로는 결코 온전히 잡히지 않는다. 호사인지 아닌지를 엄밀히 따져보거나, 희생의 무게를 저울질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손 밖을 삐져나간 모순을 안는 것은 말끔한 초월(超越)이 아니라,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부족한 초월이다.


모순을 끌어안고도 무너지지 않는 것. 그 모습이 마치 끌어안는 포옹과 같아서 포월(抱越)이라 불렀다.

그래서일까. “살아간다”는 마치 “사랑한다”처럼 들린다. 완벽히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다 안을 수 없어도 하루가 지나가듯이. 사랑은 삶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삶이 삶으로 느껴지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건 취약하다는 뜻이고, 그 취약함은 어딘가와 연결되어야만 견딜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삶이 ‘사람’에서 멈추지 않고 ‘사랑’으로 흐르는 건, 우리에게 'ㅇ'이라는 결핍이 있어서이다.

결핍이 있어서 우리는 굴러갈 수 있다. 완전하다면 사랑이라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질문 부스러기 # 18


한 해를 보내며, 당신은 무엇을 안고 가나요?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