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이 여겨도 되는 죽음은 없다.
죽어가는 시간과 죽음의 시간 앞에서 나는 늘 환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좋은 곳으로 가세요. 이제 아프지 말고 편해지세요.'. 속으로 또는 입 밖으로 꺼내어 말했다.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치르는 나만의 절차였다.
신규시절은 죽음 앞에서 눈물이 가벼운 편이었다. 마스크를 눈 바로 밑까지 올려 쓰고 눈물을 주르륵 흘렸었다. 혹여 누군가 내가 우는 걸 눈치챌까 싶어 마스크를 내리고 닦아내지도, 코를 훌쩍이지도 않으며 남몰래 울었다. 죄책감도 한없이 많이 느끼던 때였다. 내가 담당간호사인 시간에 환자가 안 좋아지면 모두 내 탓인 것만 같아서 퇴근할 때면 또 마스크를 찾아 눈밑까지 올려 쓰곤 했다. 모든 게 부족한 신규간호사라서, 그런 내가 담당간호사라서 빨리 처치해주지 못해 안 좋아진 건 아닐까 싶었다. 혹여나 갑자기 상태가 악화돼서 내 담당 환자분이 돌아가시는 날에는 내가 담당간호사가 아니었다면 살 수도 있었지 않을까 하며 신의 영역을 의심하기도 했다.
후회가 남지 않을 정도로 내 일을 어느 정도 해낼 수 있는 연차가 되면서부터 환자들을 보내드릴 때의 마음가짐이 바뀌었던 것 같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줄다리기하고 있는 환자를 삶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그 시간들 내내 힘들고 괴로웠을 이 환자들에게 이제 후련한 마음으로 편히 가시라고. 고생하셨다고. 예의 바른 마음으로 보내드리자는 생각을 했다.
전쟁터 같은 죽음의 문턱에서 1분 1초 긴장을 놓을 수 없던 시간들을 보내고 끝내 찾아온 죽음에 허무할 때가 많았다. 8시간 내내 물도 못 마시고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가면서 지켜내려고 노력했지만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내 노력에 대해 허무하다고 토로할 필요도, 안타깝다고 오래 붙들고 슬퍼할 시간도 없다. 떠나간 환자를 위해 그리고 남겨진 마지막이자 전부인 보호자들을 위해 많은 절차들을 지체 없이 제공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죽음이라는 것에 점점 무뎌진다. 하지만 남은 일들을 빨리 해내야 한다고 해서, 무뎌졌다고 해서 죽음을 가벼이 여기면 안 된다. 그게 내 다짐이었고, 나만의 절차가 생긴 이유다.
우리는 떠나가는 환자들의 곁에 남겨진 첫 번째 사람으로서, 내 감정을 내세우기보다는 '잘' 애도하고 '잘' 보내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