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글에서 이야기했듯 신이 중심이던 세상을 인간 중심의 세상으로 바꾼 르네상스는, 인간의 존엄을 인간 스스로에게 각인시켜 주는 한편 학문의 영역에서는 과학을 신학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했다.
결과는 엄청났다.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적 사조(思潮)는 사람들에게 인본의 가치를 인식시켜 주었고, 과학의 학문적 성취는 훗날 산업혁명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을 근대시민사회로 이끌어 준 기폭제였던 것이다.
르네상스는 다름 아닌, 오늘날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의 시발점이었다.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르네상스 이전 사람들의 삶은 고단함 자체였다.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삶이었다.
소수의 지배 계층을 제외하고 말이다.
경제적으로는 제대로 먹고 입을 수도 없었고, 정치․사회적으로는 인격의 주체가 아닌 생산의 수단이자 착취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르네상스는 이런 문제들을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었다.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기술사회는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인본주의에서 출발한 르네상스는 지배 계층, 피지배 계층 모두에게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며 오늘날의 사회를 인권 중심의 사회로 만들어 주었다.
물론 아직도 지구촌 곳곳에는 분쟁과, 독재와, 저개발에 따른 빈곤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인간사회의 전반적 삶은 그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풍요와 복지를 누리고 있다.
르네상스는 예술의 부흥과 발전이라는 표면적 성취를 뛰어넘어, 인간의 삶의 질에 근본적인 향상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르네상스는 한편으로 인간들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했다.
기술의 성취를 이룬 유럽문명의 확대는 상대적으로 비유럽문명을 절멸 상태로 몰아갔다.
유럽인들은 신세계로의 진출 과정에 수많은 선주민들을 학살했으며, 사람들을 상품화―아프리카인 노예화―했다. 인종우월주의의 발생과 확산에 따른 온갖 폐해들을 야기했던 것이다.
유럽 내에서는 도시 빈민들의 삶을 인간 이하의 그것으로 몰아넣기도 했다.
인류 사상 최악이자 최대의 전쟁이었던 양차 세계대전의 발발 또한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폐해들은 아직까지 진행 중이기도 하다.
빛의 이면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이자 르네상스의 두 얼굴이라 할 수 있겠다.
르네상스는 예술의 발달과 기술의 발달만을 일컫는 게 아니다.
인본으로의 회귀를 통한 인간 존엄성 회복의 의미를 함께 아우르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이것이 시사하는 함의를 차분히 생각해 볼 때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지 칠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그 함의를 새로이 확대시켜 가야 한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것들과 훗날을 살아갈 후배 세대들과 공존․공생․공영(共存․共生․共榮)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르네상스로 확대․재생산해 가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항구적으로 지속가능한 것이 되어야 함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르네상스 들여다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