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맛보기 삼국유사三國遺事

우리 역사의 보고寶庫이자 우리 인문학의 정수精髓

by 할리데이

신라 경덕왕 때 사람 ‘욱면(郁面)’은 계집종이었다. 비천한 신분에다, 남성 중심 사회이던 신라에서 성별마저 여성이었던 욱면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최하층민의 삶을 살면서 하루하루 삶을 이어가야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을 따라 가본 절에서 불법을 처음 접한 욱면은, 불도 수행을 완성하여 자신도 성불에 이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욱면은 매일매일 불경을 외우면서 수행에 정진했다. 이웃으로부터의 비웃음과 주인의 핍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도를 닦던 욱면은 마침내 불도를 터득하면서, 신묘한 음악을 배경 삼아 하늘로 올라갔다. 성불에 이르렀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자아실현을 이룬 셈이다.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밑바닥 인생이던 욱면이 결국 출세를 한 것이다.


무열왕(태종, 김춘추) 대의 승려 원효(元曉)는 불도가 경지에 이른 고승이었다. 하지만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행적은 여느 승려들과 달랐다. 특히 불법을 전파하는 과정은 더욱 남달랐다. 법당에서의 판에 박힌 설법 대신, 민초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춤과 노래로 불법을 전파해 갔던 것이다. 불교 사회이던 당시로 보면 원효는 사회 지도층 인사이자 귀족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특권을 벗어던지고 서민들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다.


성덕왕 대를 배경으로 한 노힐부득(努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이라는 두 청년의 이야기는 더 극적이다. 지금의 창원 동남쪽에 있던 선천촌(仙川村)이라는 곳에서 살던 두 청년은 젊어서부터 불도 수행에 뜻을 두었다. 불도를 완성하기로 결의를 다진 두 사람은 백월산(白月山)에서 뼈를 깎는 수행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리따운 여인으로 현신(現身)한 관음보살이 두 사람을 시험에 들게 했다. 여인은 먼저 달달박박의 거처를 찾아가 하룻밤 재워 주기를 간청했다. 하지만 금욕을 중시하던 모범 수행자 달달박박은 이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여인은 발길을 돌려 노힐부득의 거처를 찾아가 같은 부탁을 하였고, 야심한 밤에 갈 곳 없는 여인을 내칠 수 없었던 노힐부득은 여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어려움에 처한 중생을 돕는 것도 수행의 한 방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밤 갑자기 그 여인이 산기(産氣)를 보이며 노힐부득에게 도움을 청했다. 노힐부득은 망설임없이 물을 데우고서 정성스럽게 아이를 받아냈다. 그제서야 여인은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드러내며, 노힐부득을 성불에 이르게 했다.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놀랍게도 다음 날 아침 달달박박도 성불을 이룬 것으로 이야기가 끝을 맺는다. 노힐부득은, 관음보살의 몸을 씻겨준 물에 자신도 몸을 씻으면서 성불에 이를 수 있었는데, 달달박박 또한 그 남은 물에 목욕함으로써 성불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설화를 통해 개방주의자인 노힐부득과 원칙주의자인 달달박박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성불시켜 주었다. 이것 또한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사람 모두를 출세시켜 준 것이다.


이 세 이야기는 고려시대 말 승려 보각국사 일연(普覺國師 一然)이 저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설화들이다.

일연은 계집종 욱면의 설화를 통해, 여하한 역경 속에서도 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있다면 결국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와 대비되는 원효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서민들과 고락을 같이하는 상류층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오늘날에도 사회 지도층들이 본받아야 할 노블리스의 전형을 담백하게 그려내고 있다.

한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설화를 통해서는 또 다른 맥락의 메시지를 전한다. 욱면의 설화가 ‘하면 된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원효의 이야기가 ‘하여야 한다’라는 오블리주를 강조한 것이었다면,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는 사람들이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설화에서는, 목표와 수단 간의 관계 또는 목표와 그 목표 달성을 위해 취해야 할 접근 방법 간의 관계를 명료하게 나타내고 있다. 일연은 노힐부득의 개방적 태도이든 달달박박의 원칙 지향적 태도이든 상관없이 둘 다 목표를 달성토록 함으로써, 목표 달성을 위한 실천 과정상의 접근 방법은 부차적일 뿐이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참된 목표와 그것의 달성을 위한 실천 의지의 중요성을 오롯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이처럼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득 담겨있다. 이뿐이 아니다. 삼국유사에는 그것에 더해 우리 민족의 기원을 담은 단군신화를 비롯,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시가(詩歌)인 향가도 14수나 실려 있다. 지금은 실전(失傳)되어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옛 역사서만 수십 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토대로, 그리고 방대한 양의 사료와 개성 넘치는 상상력과 애민정신을 토대로 세상살이를 담아낸 삼국유사는, 우리 역사의 보고(寶庫)이자 우리 인문학의 정수(精髓)이다.


덧붙이는 이야기다. 대구 군위에 인각사라는 아담한 사찰이 있다. 다름 아닌,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했던 곳이다. 일연은 무신의 난과 몽골의 침입으로 나라의 안위가 위기에 처하고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지자, 역사의 정립을 통해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말년이 되어 인각사에 이른 일연은 그렇게 삼국유사 집필에 들어갔다.

인각사에 가면 보각국사 일연의 제자인 법진대사가 스승의 일대기를 담아 건립한 보각국사 비와 탑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본당인 극락전 뒤편에 조그마하게 자리하고 있는 미륵전에서는 일명 ‘팔 없는 부처’ ‘고려의 비너스’라고도 불리는 석불좌상의 은은한 미소도 감상할 수 있다. 그 인각사에서 새벽이라도 맞이할 때면, 자욱한 안개 너머로 설화 속 옛사람들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미륵전 석불좌상> 불상의 미소가 그윽하다. 팔 없는 부처 또는 고려의 비너스로도 불린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빅뱅에서 인류까지 22 형제들 ⑦-⑦ 천왕성, 해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