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 달 이야기 > 경쟁과 도전 ②-① 경쟁의 결과
1969년 7월 16일, 세 명의 우주비행사를 태운 달 유인탐사선 아폴로 11호가 화염을 뿜으며 하늘로 솟아올랐다. 4일간의 비행 끝에 달 궤도 진입에 성공한 아폴로 11호는 몇 차례의 위험한 상황을 아슬아슬하게 넘기며 착륙선 ‘이글호’를 무사히 달의 땅에 착륙시켰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입니다.”라는 유명한 말과 함께, 아폴로 11호의 선장 닐 암스트롱이 달에 역사적인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인류가 바깥 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말 그대로 ‘위대한 도약’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의 이러한 위대한 성취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불행한 역사와, 전후(戰後)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간의 처절하던 냉전의 성과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열세에 몰리던 나치독일은 불리한 전세를 단번에 만회할 수 있는 전략무기가 필요해 졌다. 이를 위해 독일은 당시까지만 해도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던 신개념 무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적국이던 미국의 본토를 직접 타격하기 위한 대륙간탄도미사일, 바로 로켓을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이 개발에 성공한 이 장거리 로켓탄 V2(vergeltungswaffe2, 보복무기)는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훗날 인류가 우주로 쏘아 올리게 될 수많은 우주발사체의 원조가 되어 주었다.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구소련으로 흘러 들어간 나치독일의 로켓기술은 양 진영 간의 냉전을 지렛대 삼아 다시 한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군사 전략적 차원에서 우주 공간을 선점하려는 시도와 함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어우러지면서 로켓기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양대 체제의 대표격이자 냉전시대의 초강대국이던 미국과 소련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가, 우주 진출이라는 인류의 오랜 몽상(夢想)을 실현 가능한 꿈(dream)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1라운드는 소련의 승리였다. 소련은 로켓 하나의 추진력만으로는 사람을 태울 수 있는 크기의 우주 비행체를 지구 궤도에 올리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더욱 크고 강력한, 그리고 고도화된 방식의 로켓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찍 간파했던 것이다. 기술개발에 매진하던 소련은 결국 R7(Raketa7)이라는 다단계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성공한 뒤, 1957년 10월 R7에 스푸트니크(Sputnik) 1호를 실어 지구 궤도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상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것이다. 소련은 여세를 몰아 유인 우주 비행에서도 선점을 차지했다. 1961년 4월 12일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Yuri Gagarin)을 태운 소련의 보스토크(Vostok) 1호가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귀환에 성공해 버렸다. 우주개발 경쟁 1라운드는 사실상 소련의 독주였다. 물론 이 무렵 미국도 소련의 활약을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직후인 1958년 1월,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익스플로러(Explorer) 1호를 성공적으로 발사하는 한편, 우주개발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나사(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NASA, 미항공우주국)를 설립하는 등 우주 경쟁에서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획기적인 전기(轉機) 마련 없이는 미국이 소련을 따라잡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미국은 1라운드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2라운드를 기약해야만 했다.
미국은 다급해졌다. 1라운드에서의 패배를 만회할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해진 것이다. 결국 미국은 우주경쟁에서 소련을 따라잡고 우주개발이라는 종합(과학, 군사, 경제 등) 영역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야심 찬 계획을 내놓게 된다. 1960년대 내에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는 아폴로 계획이었다. 우주경쟁 2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뒤 미국은 결국 1969년 아폴로 11호 발사를 통해 인간을 달에 보내는 데 성공하게 된다. 이후 아폴로 17호까지 발사에 연속 성공하면서*, 미국은 유인 달 탐사 분야에서는 확실한 우위를 선점하게 되었다. 반면 이 시기 소련의 유인 달 탐사는 실패를 거듭했다. 달 탐사 로봇을 달에 착륙시키는 등 소기의 성과는 거두었지만, 사람을 달에 보내겠다는 소련의 꿈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우주 경쟁 2라운드는 이렇게 미국의 압승으로 끝을 맺게 된다.
[*여기서 아폴로 13호는 제외해야 한다. 아폴로 13호는 지상에서의 발사에는 성공했으나 달로 향하는 비행 도중 산소탱크 하나가 폭발해 임무수행에 실패하게 된다. 이후 아폴로 13호 달 탐사 계획은 우주비행사 3명의 무사 귀환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미국의 압승으로 끝난 2라운드 결과, 미소 양대국의 우주개발에 대한 열기는 오히려 한풀 꺾였다. 아폴로 계획의 경우만 해도 당초 미국은 아폴로 20호까지 발사할 계획이었으나, 17호 발사 성공 이후 계획을 중단해 버렸다. 더 이상 정치적으로 얻을 이득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2라운드에서 참패를 당한 상황에서 유인 달 탐사를 통한 정치적인 이득은 전혀 기대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미‧소 양국은 차라리 금성이나 화성 같은 행성 탐사로 눈을 돌리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그때를 즈음해 지금 우리가 알고 수많은 태양계 탐사선들이 우주로 쏘아 올려졌다. 이렇게 20세기 중후반을 장식하던 미‧소 양국 주도의 1차 우주 경쟁 시대는 20세기와 함께 저물어 갔다.
하지만 21세기가 되면서 또다시 달 탐사를 필두로 하는 ‘신우주경쟁 시대’가 열리게 된다. 미‧소 양국 주도가 아닌 세계 각국이 참여하는, 정치‧군사적 목적이 아닌 경제적 목적의 치열한 경쟁의 막이 열린 것이다.
<②-②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