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한 내일
저 멀리 남태평양의 이스터섬에서는 한때 찬란한 문명의 꽃이 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찬란했던 문명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말입니다.
모아이 거석상 천여 개만 하릴없이 남아 있을 뿐이죠.
인류사회학자들의 분석이 의미심장합니다.
그들은 어떤 문화나 문명, 또는 사회가 붕괴하는 데에는 수많은 증상이나 징후들이 사전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다만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전조나 징후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징후를 인지해 놓고도 애써 무시하거나, 뒤늦게 조치를 취하고자 하지만 이미 늦어버리게 되는 과정 등을 거치며 그 사회가 붕괴해 간다는 것이지요.
이스터섬에 사람들이 처음 도착했을 때, 섬은 수많은 나무들로 뒤덮인 초록이 무성한 섬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물고기를 잡으러 나갈 배를 만들기 위해, 땔감을 위해, 모아이 거석상을 옮길 받침목으로 쓰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고 또 베어냈을 거랍니다.
그리고 결국은 나무 한 그루 남아 있지 않은 불모의 섬이 되어 버렸고, 덩달아 그 찬란했던 문명도 사라지고, 왁자지껄하던 사람들까지 절멸해 버렸을 거랍니다.
(추측과 가설에 근거한 것이라 합니다.)
학자들은, 언젠가 ‘특정시점’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답니다.
이스터섬 사회의 구성원 중 하나 또는 섬 사회를 이끌어 가던 리더 그룹이, 이대로 가면 섬의 나무가 다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이 곧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였을 특정시점이라는 것이 있었을 거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버린 후였을 것이고,
그리고는 쓸쓸히 종말을 맞이했을 거라며 추측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아니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초점을 현재로 옮겨 볼까요?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인류는 우주 탄생 이후 억겁의 시간을 거쳐 오면서,
수많은 우연과 진화와 발전을 거쳐 오늘날 고도화되고 풍요로워진 문명과 문화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은 그 과실을 마음껏 음미하고 있습니다.
마치 전성기 때의 이스터섬 사람들이 풍요로운 숲에서 나무를 마음껏 베어낼 때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 해보겠습니다.
오늘날의 인류도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될 특정시점을 목전에 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계에 도달한 이스터섬이 언젠가 숲의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듯이 말이죠.
우리 사는 지구도 이제 막 한계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환경오염과 기후변화와 통제를 잃은 기술사회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앞선 글에서 제기한 질문과 연계해 보겠습니다.
어제보다 나은 오늘, 나아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란 어떤 오늘과 내일일까요?
낫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요?
이스터 섬의 주민들이 어제까지 겨우 하루 한 척의 배를 만들다가 두 척의 배를 만들 수 있을 만큼 기술발전을 이루었을 때, 과연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이루어진 걸까요?
결국 섬사회의 문명을 절멸시키게 된 두 척의 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사회가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의 사회’였을까요?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란 일시적인 것이 아닌 바로 지속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낫다는 것 또한 그릇된 방향이 아닌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전개여야 합니다.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라고 말이죠.
정답은 가능하다입니다.
우리 사회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통제를 통해서 말이죠.
자연과학에 기초한 기술과 인문학에 기초한 철학이 수반된 자기 통제를 통해서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통제의 결정체야말로 스마트사회입니다.
4차 산업혁명에 기초한 기술사회가 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줄 것이라고 우리들은 믿고 있지요.
반은 맞는 말입니다.
말씀드렸듯 고도화된 기술사회가 어제보다 나은 삶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아직 반이 부족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통제에 따르는 불편함으로 나머지를 채워야 합니다.
이스터섬 사람들이 특정시점에 이르기 전에 나무를 아껴 쓰는 불편을 감수했어야 했듯 우리도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일회용품을 쓰지 말아야 하고, 화석연료를 덜 써야 합니다. 걸어 다녀야 합니다.
불편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답게, 사회구성원 누구나가 따를 수 있는 자율적 통제와 체계화된 시스템을 통해서 말이죠.
스마트하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