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염세적인...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고, 입술이 없어진 연후에야 잇몸이 시린 것을 알게 된다는 말이 있다. 소중한 것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가 그것이 없어지거나, 그것을 잃고 난 뒤에야 가치를 알게 된다는 말이다. 건강에 대해서도 우리는 자주 그렇게 이야기한다. 건강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 소중함에 대해서 알게 된다며 말이다. 평소에는 잘 잊고 지내는 건강의 소중함을 에둘러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얼마 전 죽음에 이를 정도의 병을 앓게 되면서 조금 다른 생각을 품게 되었다(의사가 아내에게 장례를 준비하라고 했을 만큼의 병을 앓았다. ‘상장간막동맥박리’라는 병이었다).
건강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더라는 것이다. 엉뚱한 얘기 같지만 사실 건강이란 게 우리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병세가 나타나면서 꼼짝없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을 무렵, 나는 하릴없이 결과만 기다릴 뿐이었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꼼짝없이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들조차 자기네들이 할 수 있는 조치를 전부 취해 놓고는 어느 방향으로 진행될지 모를 최종결과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뿐 아니라 가족들과 의사들을 포함한 다른 그 누구도 나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다시 말해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오로지 기다리기만 해야 할 뿐이었다.
그때,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과 의지가 간절했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던 그때, 그래서 오로지 결과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바로 그때, 건강이란 게 그토록 중요하기만 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건강을 위해 애쓰고 노력하며 조바심 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더라는 것을 시나브로, 그러나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이 세상에 조물주가 있다면 건강이란 건 어차피 그 조물주가 지정해 주는 대로만 받아야 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용하는 것이 건강일진대 어차피 건강을 위해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내 삶에 있어 건강이란 게 그토록 중요하거나 대단한 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 장면을 잠깐만 돌려보자. 건강이란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강변한다고 해서, 내가 삶을 막살아가고 있다거나 막살아가겠다는 것은 아니다. 요즘의 나는 말과 달리 술도 끊고 담배도 끊었다. 또 식이요법을 하는가 하면 전에 없이 규칙적으로 운동도 한다. 건강을 위한 행위가 별 의미 없는 행위임을 강조하면서, 오히려 그런 행위들을 전에 없이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말의 앞뒤가 맞지 않게 말이다. 두 가지 간단한 이유 때문이다.
스스로 죽음을 재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령 술과 담배는 내가 앓았던 상장간막동맥박리라는 병에는 치명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요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무절제하게 술 담배를 계속 즐긴다면(나는 아프기 전 술 담배를 제법 즐겼다), 아무리 내 몸이 내 것이라 하지만 그것은 너무 무책임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구렁텅이로 스스로 뛰어들 수는 없지 않은가? 단순하지만 이게 첫째 이유다.
둘째 이유는 조금 막연하게도, 다름 아닌 나 자신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중환자실에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향방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때, 만약 내가 살아서 퇴원하게 된다면 무절제하던 생활습관을 버리고 앞으론 좀 사람답게 살아가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내 몸도 좀 아껴가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했듯 나 자신에게도 예의를 갖추리라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런 것들의 일환으로 요즘 제법 착실하게, 맞춤형 식이요법과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있다. 당연히 금주와 금연도 지켜 가면서다.
이제 다시 본래 이야기다. 되게 아프던 그때 나는 죽음을 각오했었다. 그리고 일상으로 무사히 복귀한 지금도 언제든 어디서든 어떤 형태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다는 생각을 늘 지니고 있다. 또 죽음이란 것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동반자처럼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러고 나서부터는 삶을 대하는 자세에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 앞서 얘기했듯 사람들이 그토록 신경을 쓰고 있는 건강 문제에 대해서도 비교적 초연하게 되었고, 이젠 무언가를 할 때도 조바심을 내지 않게 되었다. 아프기 전보다 더 낙관적인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사실 이 글은 부제(副題)와 같은 그런 염세적이기만 한 글이 아니다. 오히려 낙관적인 글일 수도 있다. 사람이 살면서 지녀야 할 여유로움을 이야기하고 있어서다.
물론 우리네 삶은 결코 녹록하지 않다. 우리네 인생행로는 몇 차례의 성찰과 영감, 그리고 어쩌다 한 번씩 무릎을 치며 얻게 되는 깨달음만을 동력 삼아 완주해 갈 수 있는 그런 쉬운 여정이 아니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난관으로 가득 찬, 치열한 고뇌와 피땀 어린 노력을 동반하지 않으면 헤쳐나갈 수 없는 그런 험난한 여정이다. 벼랑 끝에서 곡예라도 하는 듯한 삶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삶의 여유’와는 거리가 먼 딴 세상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라도 여유로움을 이야기해야 하고, 삶의 한 켠을 여유로움으로 채워 가야 한다. 스스로 말이다. 비록 우리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늘 아등바등할 수밖에 없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스스로 여유롭게 삶을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여유로움이야말로 행복을 만들어 가는 기본적인 요소이자, 최상급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나는 병의 고비를 넘기고 난 후, 조바심을 조금 덜 내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의 생활이 윤택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바심을 덜 내는 것만으로도 그러한데, 자신의 삶과 세상 사는 이치를 관조하며 타인의 삶에도 배려심을 가지는 정도의 여유로움을 가지게 된다면 우리네 삶은 아마도 훨씬 더 윤택해지고 훨씬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살아가면서 조급해하거나 조바심을 낼 필요가 없다. 삶의 달관자라도 된 듯한 표현에 조금은 머쓱하지만,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겁낼 필요가 없다(육체의 고통은 별론으로 하자). 어차피 찰나와도 같은 시간 앞에서 무어 그리 조급해할 필요가 있겠나? 죽음이란 것 또한 마찬가지다. 찰나만큼의 빠르고 늦고의 문제만 있을 뿐, 어차피 모두가 겪을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이제 우리, 가슴 한 켠에 여유로움을 가득 품고 살아가자. 어쩌면 그 여유로움 속에서 진정 행복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