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코기토

그리고 심신이원론

by 아린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감각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해, 꿈의 가능성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교활한 악령의 가설에 이르는 점진적 심화의 과정을 거친다.

먼저, 데카르트의 회의는 감각의 오류가능성을 가진다. 그는 한 번이라도 우리를 속인 가능성이 있는 것은 모두 신뢰하지 않는다. 감각은 때때로 오류를 일으키기 때문에, 감각에 근거한 모든 믿음은 일단 배제된다. 심지어 일상적으로 ‘참’이라고 여겨지는 감각적 사실들(예를 들어 우리가 이 글을 읽고 있는 것)마저도 예외 없이 의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다음으로, 그의 회의는 가설로 설명되기도 한다. 그는 꿈의 가능성을 제기하여, 우리가 깨어 있을 때와 꿈꿀 때의 경험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감각 경험 전반을 불신한다. 또, ‘악령의 가설’을 도입하여, 전능하고 교활한 악마가 우리의 판단을 속이고 있을 수도 있다고 가정한다. 이는 ‘2+3=5’같은 수학적 명제나 논리적 진리마저 의심의 대상으로 확장하는 극단적 회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모든 것을 의심하는 과정 속에서도, 데카르트는 한 가지 사실만큼은 결코 의심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바로 “의심하고 있는 나 자신”의 존재이다. 의심하고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의심 그 자체를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이로써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확실한 명제를 도출하게 된다.

코기토는 지식의 토대를 제공하는 대단한 발견이었으며, 외부 세계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주체의 존재를 확보했다는 지대한 의의를 가진다. 이는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주인공이 자신이 살던 현실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가상세계임을 깨닫는 상황에서 악령 가설처럼 우리의 모든 감각과 경험이 기계에 의해 조작된 허상일 수 있다는 상황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조작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의심하는 나'의 존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코기토는 이처럼 모든 외부 지식이 붕괴하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유일한 진리를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명제는 유명세만큼이나 많은 반론이나 의심을 제기해 왔다. 대표적으로 코기토는 불완전한 논증이라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라는 전제에서 ‘나는 존재한다’는 결론이 도출될 수 없으며 추가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데카르트의 논증을 잘못 오해한 것이다. 데카르트 코기토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대해 제기되는 추가 전제 필요성의 비판은, 일반적으로 논리적 삼단논법으로 해석할 때 “생각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 사이의 연결 고리가 불명확하다는 점에서 나온다. 즉, “나는 생각한다”라는 진술이 “나는 존재한다”라는 결론으로 ‘연역’되려면 “사유하는 자는 존재한다”라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비판이다.​

그런데 만약 “존재한다”는 말이 그의 저서인 <제1철학성찰>에서 볼 수 있듯이 데카르트가 의도한 대로 ‘심리적 존재’ 혹은 ‘사고 행위를 행하는 주체로서의 존재’를 의미한다면, 이 전제는 추가적으로 명시할 필요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나는 생각한다” 자체가 곧 자기 존재의 ‘직관적 경험’이며, 여기서 존재는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심리적 주체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나는 생각한다”는 말 자체가 이미 “사유하는 존재가 있음”을 내포하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결론은 별도의 논리적 추가 전제 없이 곧바로 파악되는 직관적 진리, 즉 자기 자체로 존재를 확증하는 ‘순수한 내재성’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결국 코기토 명제에 대한 불완전성 비판은 대전제가 생략되어 있어 논리적 비약이라는 데에 기초하지만, 코기토를 단순 연역 논증이 아닌 ‘직관적 확실성’으로 보면 그 비판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라는 직관적 명제가 논리적 비약이라는 비판을 피했다 하더라도, 그 내용 자체는 존재론적인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성찰자가 확실히 의식하는 것은 단지 사고 함이라는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여기서 나라는 영속적이고 통일된 실체의 존재가 도출되는 것은 과연 필연적인가? 흄과 같은 경험론자들이 지적했듯이, 경험적으로 우리가 포착하는 '나'는 통일된 실체가 아니라, 순간순간 발생하는 지각, 사고, 감정의 다발 또는 흐름에 불과하다. 결국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사유의 존재는 증명했을지라도, 그 사유를 영속적으로 소유하는 통일된 '정신 실체‘의 존재까지 확실하게 보장하지 못한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코기토 한계에 이어 데카르트가 주장한 심신이원론(아까 언급한 것처럼, 정신적 존재와 신체적 존재를 따로 본다)도 마찬가지로 코기토를 통해 영구적인 정신실체가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나‘가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단순한 사고의 다발에 불과하다면, 물질과 대비되는 비물질적 실체를 주장하는 이원론은 그 존재론적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이원론 자체의 심신 상호작용의 고질적 문제도 극복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코기토는 사유의 확실성은 확보했지만, 그를 통해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정신실체를 확립하고 세계를 이분화하려는 시도는 한계를 가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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