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을 대화 소재로 꺼내기는 여러모로 난처하다. 내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상태. 다른 사람보다 불행할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수치심. 결론적으로 주변인들의 많은 걱정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살 이야기를 꺼내면 모두가 천연덕스럽게 막아야 하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삶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누구도 실제로 긍정하며 살아가는 것 같지 않은데 막상 죽으려 하면 달려 막는다. 그것은 정말 자살 시도자를 위한 일인가?
자살은 왜 비도덕적이라 여겨지는가? 기독교 교리의 관점에서 삶이 신이 준 선물이라면, 오직 신만이 우리의 삶에 대해 지당한 도덕적 권한을 가지므로 자살은 잘못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우리는 신의 소유물이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기묘한 소유물이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동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의 온실에 수동적으로 놓여 있는 식물이 아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능력이 어떻게 이해되든 그것은 신의 의지에 반해 행동할 수 있게 해준다. 내가 잘 행동하기 위해 나의 불완전한 의지를 신의 완벽한 의지에 동조하기를 바랄지라도 그런 동조는 결코 이루어지지도 않거니와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나의 의지가 신의 의지라고 주장한다면 나의 모든 행동이 신성하게 인가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며, 이는 죄악이 아니더라도 오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의 소유물이라면 우리는 부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채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종교적 논거는, 삶은 신이 준 선물이기 때문에 자살이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살하는 것은 그 선물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면 혼란스러워진다. 선물이란 무엇인가? 선물은 한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주는 행위 후에 선물을 받는사람의 것이 된다. 정의에 따르면 선물을 주는 사람은 선물을 주고 나면 더 이상 선물을 소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살 금지가 삶은 신이 준 선물이라는 생각에 근거한다면, 삶은 많은 조건이 달린 선물처럼 보이며 이는 그것이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선물은 선물이 아니다. 삶이 신이 준 선물이라면 신은 그 선물을 거부하는 행위로써 자살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논증에 따라 자살은 비난받을 수 없다.
모든 이론과 상관없이 신은 우리를 무한하게 사랑하기 때문에 그 관점에서 자살을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도, 신이 우리를 무한히 사랑한다면 그런 사랑은 피조물이 고통을 견디기 너무 힘들때는 자살을 허용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무한히 사랑을 베푸는 신이 어떻게 참을수 없는 고통을 지속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가? 그런 지속 상태를 요구하는 것은 사랑과 계명의 순전한 힘을 혼동하는 것이 된다. 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신이 우리를 무한히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거부할 권리가 있어야하고 , 삶과 죽음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자 그럼 종교적 관점에서 벗어나 특정 철학가의 관점에서 자살에 대해 얘기해보자. 많고 많은 철학자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철학자인 칸트의 주장을 살펴보겠다. 칸트는 합리성과 자율성은 도덕적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정당하게 적용받는 유일한 법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제정한 법이다. 그런데 자살과 관련해 내가 어떻게 자율적일 수 있는가? 나는 자율성을 제거하기 위해 자율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타율적인 죽음이라는 사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 내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인 죽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살이란 암묵적으로 비합리적인 맹신이지 않은가? 혹자는 이와 같이 칸트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칸트의 이러한 논리에는 몇 가지 모순이 있다. 크게 3가지로 반박해보자면..
1. 인간은 자신의 삶을 시작할 때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스스로 삶을 종결할 시점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삶 전체에 대한 궁극적이고 유일하게 완전한 자율성의 행사가 아닌가?
2. 우리는 죽음 자체를 경험할 수 없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 고통은 경험할 수 있다.(이 측면에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에피쿠로스의 논증도 함께 반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살은 이 경험된 고통을 종식시키고 다가올 고통의 예측하에 이루어지는 합리적 추론의 결과가 아닌가?
3. 칸트의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에 근거하면 자살을 금지하고 고통 속의 삶을 강요하는 것이, 사람을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 도덕적 도구'로 사용하여 한 개인의 고통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행위가 될 수 있지 않은가?
결국 자살은 비합리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옮겨간다. 칸트가 말한 자율성이 자기 파괴를 포함할 수 없는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만약 인간의 도덕성이 자기 의지의 자율성에서 비롯된다면 그 자율성이 ‘삶의 지속’만을 목표로 제한되는 순간 이미 훼손되는 것이다.
물론 내가 자살을 조언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누군가의 자살을 보며 그 죽음을 단순히 ‘비극’이나 ‘실패’로만 해석하는 것은 그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일 수도 있다. 죽음은 대개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우울증이나 암 같은 견딜 수 없는 고통처럼 다른 이유로 선택된다. 그러나 자살이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 선택에 대해 쉽게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며 평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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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자살률 1위 국가라는 오명을 유지해왔다. 30분마다 한명씩 죽고, 최근에는 20대-30대뿐만 아니라 40대에서도 암을 제치고 사망원인 1위를 차지할 만큼 자살이 만연한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자살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살 관련 뉴스가 보도될 때마다 잠시 관심을 가지지만 곧 아무 일 없던 듯 관심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앞으로 자살에 대해 어떻게 애도해야 할지 또 어떤 태도로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을 단지 ‘그 죽음의 순간’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그들의 삶을 단순화하고 복잡성을 박탈하는 일이다. 분명한건 그것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며, 그것을 ‘극단적 선택’이라는 얄팍한 표현 하나로 덮어버리기엔 그 안에 너무 많은 고통과 맥락이 존재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