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의 대화 1

나의 독백 : 산책

by 케르겔렌

또 징그러운 침묵이네.


나는 텅 빈 방안을 보며 홀로 속삭였다. 익숙해지는 것이 씁쓸하기도 하나 가끔은 심히 절실해지는 고요. 나의 이중성에 소름이 돋는다. 굳게 닫힌 창문과 커튼은 시허연 빛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마지못해 들여보냈다. 어느새 다시 아침이구나. 또 무탈하게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가슴에 손을 얹어보니 숨이 쉬어지고 있다. 이렇게 홀로 조용히 맞는 아침이 지겨워질 법도 하다. 대체 이게 몇 번째지? 어제 밤 잠들기 전 수없이 상상하던 나의 모습은 산산이 깨져버렸다. 어둠이 흩어지듯 자취를 감추고 싶었는데 아쉽다. 늘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해가 둥글다고 정의한 이는 누구인가. 커튼을 걷고 얄미운 그와 눈싸움을 한다. 보라. 저렇게 뾰족한 모서리로 내 눈을 꿰뚫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내 소망을 비웃으려고 매번 애써 나를 찾아온다. 너는 매번 나의 모든 것을 훼방 놓는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너를 기다렸겠지. 어둠 속에 벌벌 떨면서, 네가 품고 올 노인의 새버린 머리카락 같은 빛을 그리워했겠지. 그렇다면 너를 사랑하는 이의 눈앞에만 나타나라. 그들을 먼저 네 품으로 데리고 가라! 둥글다는 그 해는 나의 생각을 비웃듯 더욱 강하게 내 눈을 찔러온다. 분명 거절의 의미다.


느릿느릿 오늘 할 일을 적어본다. 곧 스러질 삶을 위해, 무의미한 보석을 얻기 위해 악착같이 해야 할 일들이다. 줄줄이 적힌 이 글자들을 꿰어 목에 건다. 목걸이 같기도 하고 목에 채운 칼 같기도 하다. 나를 자유롭게 해줄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데. 그런 절대적인 존재는 쥐새끼 같은 나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으리라. 이 답답한 목걸이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을 손으로 더듬어본다. 그와 동시에 전화벨이 울린다.


“여보세요.”

“좋은 아침! 오늘은 일찍 일어났구나?”

“응, 어제는 나름 일찍 잠들었거든.”

“오늘 하늘 봤어? 정말 예쁘더라고.”

“구름이 별로 없더라. 그래서 햇빛이 좀 센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산책 가자! 공원을 걸으면 분명 기분이 좋아질 거야.”


아, 썩 내키지 않는 제안이다. 하지만 별수 없지. 그냥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나는 기호가 특별히 없는 사람이다. 네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나는 함께 한다. 그 후에 풍선에 바람 빠지듯 모든 기운이 사라진대도 그건 네 탓이 아니다. 아마 너와 함께 즐기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게 될 것이다. 늘 다정한 너. 마치 모서리 없는 해 같다. 무소유의 새벽 중 빛나는 하나의 별 같다. 너를 정의할 수 있는 단어는 무수하겠지. 그런 네가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마다 나는 상당한 이질감을 느낀다.


“그래, 알았어.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나갈게.”

“빨리 올 필요 없어. 나는 먼저 걷고 있어도 되거든. 천천히 와!”


네가 늘 내게 강조하는 바는 느린 속도이다. 네가 말하길, 나는 느리지만 빠르다고 한다. 너는 머릿속에서 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거야? 네 대답은 느리지만 두 눈 속에서는 꼭 환풍기 팬이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아! 그것도 엄청 빨리! 참 너다운 비유였다. 행동은 굼뜬 주제에 생각만 많다는 이야기를 너답게도 표현한다.

그렇다면 너의 모습은 어떠할까. 나와 정반대일까. 빠르지만 느린 것! 폭포처럼 우수수 쏟아내는 말들과는 달리 네 두 눈은 공원의 저 너른 풀밭을 느릿하게 훑는다. 사람들의 발걸음에 의해 이리 저리 헤집어진 풀밭. 그의 볼품없는 지루함은 나와 참 닮았다. 물론 너는 저 속의 시퍼런 풀들에게 등이 짓밟힌 붉은 꽃 한 송이를 기어코 찾아낸다. 네 느린 눈빛이 무의미한 장소를 다시 아기자기하게 빚어내는 순간이다. 작은 조물주, 그리하여 내가 너에게 붙인 별명이다.


“꽃이 딱 하나 있네!”

“그러게. 외로워 보인다.”

“외롭지 않을 걸! 저 풀밭의 주인공이잖아.”

“혼자 있는데 어떻게 주인공이 될 수 있겠어. 누군가가 꺾어가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허허벌판에 홀로 남겨진 나의 모습을 상상한다. 사방이 흙이고 누렇게 변한 풀들이 바닥에 시체처럼 늘어져있다. 주인공이라...... 모두가 엎드러져 죽었으나 혼자만 살아남은! 그는 과연 운이 좋은 걸까, 아니면 운이 나쁜 걸까.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은 이제는 곧 그가 죽어야 할 차례임을 암시한다. 죽음이 이번에는 나를 선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줄곧 떨다가 결국 홀로 그와 대면한다. 울어줄 이도 없고 내 숨이 끊겼다는 것을 기억해줄 이도 없다. 가엾은 저 꽃도 마찬가지일 게다. 그가 떨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붉은 핏자국과 눈물로 촉촉이 젖은 꽃잎이 애처롭구나, 슬피 우는 주인공이여.

내가 꽃 한 송이를 동정하는 동안 너는 이미 저만치에서 걷고 있었다. 또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에 감탄하는 중이리라. 바람이 감싸 안은 네 감탄과 환호성이 맑은 하늘 위에 심긴다. 얄미운 저 태양이란 놈도 너의 목소리는 반기나보다. 따사로운 빛줄기를 땅위로 흩뿌린다. 모든 것들이 너의 향기로운 마음을 사랑하고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에게 나는 어떠한 존재일까. 지금 내가 밟은 이 땅은 과연 나를 기꺼워할까. 내 마음의 무게를 분명 느꼈을 텐데. 제 가슴께를 밟고 올라선 무거운 나를 좋게 여길 리는 없겠지. 내 두 다리조차도 불안과 걱정으로 엉킨 나의 심장을 감당하기엔 상당히 지쳐있다. 끊임없이 나를 짓누르는 돌덩이...... 두 발이 곧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 고목뿌리마냥 심길 것 같다. 하지만 정이 메마른 이 땅은 나를 밀어내고 거부한다. 감당하고 싶지 않은 걸까, 나를 마음에 품고 싶지 않은 걸까. 덕분에 나는 그의 위에서 역마살이 낀 듯 이리저리 헤매기만 한다. 너른 땅은 사실 그의 이름만큼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


신바람이 난 너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네 맑은 미소에도 가끔은 거짓이 담길까. 나에게는 늘 밝은 낮과 같은 모습만 보이는 너. 혹여 늘 그래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겨줄까 나는 너의 그 밝음이 아름답다고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다. 어느 날 너의 세상에 잠깐의 밤이 찾아온다면, 그리고 그 때 나를 기꺼이 초대해준다면, 네가 숨어버린 별들을 모두 찾아내고 다시 해를 맞이할 때까지 얼마든지 함께 있을 테다. 나에게 낮을 소개했던 너처럼, 나 역시 밤과 네 사이의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다리가 되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