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독백 : 밤의 호수
너는 매번 습관처럼 저 너른 들판부터 그 속의 아주 작은 꽃 한 송이까지 찬찬히 읽어 내린다. 물론 나는 네가 들판과 꽃의 아름다움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안다. 너의 고요한 눈빛. 그 뜨거운 시선의 의미는 빛을 잃고 시들어버리는 존재에 대한 슬픔일 테다. 그런데 왜 하필 ‘슬픔’인 것인가! 너는 늘 괴로움에 대한 묵상을 한다. 내가 건넨 다채로운 색들이 네 앞에서는 모두 무용지물이고, 이리저리 뒤섞여버린 흑색으로 여겨질 뿐이다.
한번은 누군가가 내게 와서 수군덕거렸다. 네가 꼭 어두운 골짝 사이에 둥지를 튼 괴짜 같다고. 괴짜라! 그렇다면 너는 그 골짜기의 주인공인 셈이다. 어둠 속의 주인공. 그러나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마치 고요한 밤 검은 호수의 표면에 비친 은은한 별같이...... 그런 네가 바라보는 세상은 대체 어떠한 모습일까. 어찌하여 너는 나와 달리 세상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것인가. 끊이지 않는 의문들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문 밖을 나섰다.
아, 보이지 않는 바람이 분다. 바람, 오늘도 당신은 정지 상태인 대지 위 나무와 풀들에게 참된 생명을 선물한다. 그들이 당신의 입김에 놀라 잠에서 깨어난 듯, 기지개를 피는 듯 살랑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한다. 때마침, 검은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공원은 자장가를 듣고 싶다며 당신을 재촉하고 있다. 어서 달래주어야 할 텐데! 칭얼거리는 공원 풀밭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준 바람은 곧 호수의 건반을 조심스레 눌렀다.
바람의 노래를 가까이 듣고 싶어서 호숫가 한쪽에 웅크려 앉았다. 두 무릎을 꼭 껴안고 턱을 기댔다. 바람이 손을 놀릴 때마다 호수의 건반에 호선이 생겨난다. 파동이 전해주는 오묘한 음악이 온 몸에 전율을 일으킨다. 그리고 호수. 밤에 바라본 저 호수는 너와 참 닮았다. 너의 고요한 눈동자가 이러했으니까. 그렇다면 이 호수 위에 비치는 것들은 곧 네가 바라보는 세상일게다. 호수의 표면이 일렁일 때마다 나무도, 달도, 나의 얼굴도 일그러진다. 거뭇거뭇한 형체들이 주름살 같은 물결 속에서 자꾸만 알 수 없이 흔들린다. 멈추고 싶은데 점점 더 멀리, 더 넓게 파문이 인다. 꼭 눈물을 떨군 것처럼, 슬픔이 불어나는 것같이. 그러다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잠잠해진다. 네 마음도 이렇게 고요함에 가려진 잦은 파동들로 괴로웠던 것일까.
문득 너와 내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네가 호숫가에서 짜증스럽게 뱉어내던 말들,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반문하던 나의 무지(無知)함.
“호수는 늘 거짓말을 해. 어느 하나 제대로 말해주는 것이 없어.”
“거짓말을 하다니? 이렇게나 투명한걸! 봐, 바닥이 다 보이잖아.”
“저건 마음을 보여주는 척 하는 거야. 아주 얕게만. 본심은 드러내지도 않았어.”
“본심? 어떤 게 호수의 본심인데?”
“시커멓고, 어그러져있는데다가 매번 울기만 하는 주제에 고고하고 정직한 척 하는 나쁜 놈.”
“하하, 그게 뭐야! 그래도 나쁜 놈이란 말은 좀 심했다. 가끔은 멋진 풍경도 담아주는데.”
“그것도 문제야. 남의 모습을 훔쳐다가 자기 모습인양 끝까지 거짓말하는 거지.”
“왜 매번 감추는데? 시커먼 속내니 우는 모습이니, 그냥 다 편하게 보여주면 안 되는 거야?”
“겁쟁이라서 그래. 홀로 남겨질까봐 두려워하는 거야. 호수의 본심이 정말 궁금해?”
“응, 궁금해.”
“그럼 밤에 찾아가봐. 아무런 기척도 내지 말고 조용히 지켜보면, 조금은 알게 될 거야.”
이제야 나의 무지함이 부끄러워진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지금껏 봐온 호수는 거짓이었다. 보는 눈이 없다는 안도로 경계심을 푼 채 뒤척거리는 불면의 호수! 뚝뚝 눈물을 흘리다가도 습관적으로 고요를 되찾으려고 한다. 하늘을 온통 일그러지게 담아내는 건 호수의 본심이 투영된 연고일까. 그러다가 또 정신을 차린 듯 구겨놓은 세상의 모서리들을 되돌려 놓는다. 네 말이 맞다. 호수의 표면은 거짓을 말하고 그 괴로운 속내는 드러내지도 않는다. 본심이 조금이라도 새어나간 때에는 몸서리치며 허상의 가면을 재차 뒤집어쓴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고, 혹은 계속 그렇게 보여야 할 것만 같아서. 오늘도 거짓 가면에 손을 대는 가여운 검은 눈동자여!
그러나 네 말 중 하나, ‘나쁜 놈’이라는 단어에는 동의하지 못할 것 같다. 저 호수가 사실은 새까맣고 온통 구겨져버린 울보였다고 해도 계속 옆에 있고 싶다. 진실이 부끄러워 거짓으로 애써 감추려는 저 가여운 모습조차도 사랑스럽다. 미처 내보이지 못한 깊은 속내가 더 궁금해진다. 얼마나 많은 감정의 색들을 억눌러 새까맣게 변한 건지, 그 사이로 헤엄쳐 들어가 가장 지쳐있는 마음바닥을 어루만져주고 싶다. 동이 트고 사람들이 다시 호숫가로 몰릴 때까지, 마침내 거짓이 아닌 진정한 기쁨의 파동을 내보일 때까지.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나는 끌어안은 두 다리를 자유롭게 해주었다. 제법 쌀쌀해진 새벽공기에 슬며시 일어나 집으로 향한다. 공원은 이미 곤히 잠에 들었는지 바람결에 뒤척이지도 않는다. 조용해진 공원에 신발 뒤축을 끄는 소리와 호수 속 아우성만 울려 퍼졌다. 호수를 닮은 너도 지금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을까. 누군가의 앞에 내보일 담담하고 고요한 모습을 위해 밤새 스스로를 옥죄고 다그치고 있을까. 네가 웅크려있지 않았으면 한다. 네 눈에 일렁이는 모든 물결이 아름답다. 무수한 이야기를 간직한 네 호수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