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순이야 놀자

by 맑음

순이는 이름처럼 성품이 순했고,

누구를 흉보거나 따돌리는 법이 없었다.

말을 아꼈고,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자신보다 어린 아이가 울면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고,

나이 많은 아이가 화를 내도 말없이 참았다.


그래서 일까.

동네 아이들은 늘 순이네 대문 앞에 모였다.


“순이야, 놀자~!” 목청껏 부르는 소리에

순이는 호미를 내려놓고 달려 나왔다.

얼굴엔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표정이 번졌다.


연화읍의 여름은 해가 빨리 뜬다.

해가 높이 오르면 밭일은 곧 고역이 된다.

그래서 어른들은 새벽 네 시면

논과 밭으로 나가야 했다.


순이네는 논농사에 담배, 고추까지 짓는 농가였다.

담뱃잎과 고추는 작물 중에서도 손이 많이 가고,

여름 내내 사람을 지치게 하는 작물이었다.


그중에서도 담배농사는 수확이 잘되면

나라에서 전량 수매 해줬기에

판로가 확실했고, 그만큼 고되기로 악명 높았다.

그래서 웬만한 집은 엄두도 못 냈지만

순이네 집은 가능했다.

일꾼으로 부릴 아이들이 많았으니까.


7월 중순.

햇빛이 가죽처럼 등을 조이는 가장 더운 날,

온 가족이 동원되어 담뱃잎을 따기 시작하면

아이들은 허리 굽혀 잎사귀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제일 밑동의 잎을 먼저 따기 시작한다.


땀이 이마에서 흘러 눈으로 들어와 따갑게

시야를 흐리고, 볼을 타고 내려와 턱 끝에 매달려

간지럽히다 땅에 후두둑 떨어졌다.


담뱃잎이 내뿜은 냄새에 머리가 어질해질 즈음

일이 끝나면 커다란 잎들을 새끼줄에 꼬아 달아

마당 한 켠,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 걸어 두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그제서야 아이스깨끼 하나를 얻었다.


여름이면 자전거를 타고 아이스깨키 장수가

마을마다 돌아다녔는데, 그가 오면

겨울동안 만들어 놓았던 수수 빗자루,

쓰고 남은 비료표대를 모아 아이스깨키와 바꿨다.


그걸 먹기위해, 몇 날 며칠을

땀이 뚝뚝 떨어지도록 일을 했다.


까만 진이 손가락 사이마다 진득하게 묻은 채로

차갑고 달콤한 아이스깨끼를 쥐고 베어 물었다.


그 찬란한 맛을 느낄 새도 없이

아이스깨끼는 금세 녹아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고,

처마 밑에 나란히 앉은 아이들은 아이스깨끼 국물이

떨어질새라 얼른 핥타가 웃음을 터뜨렸다.


땀과 얼음물이 뒤섞여 있어도,

여름에만 맛볼수 있는 별미였다.


그것이 가난한 집의 방식이었다.


그러고도 순이는 밭일 틈틈이 집안일을 해냈고,

짬이 나면 뒷마당 너머 고추밭까지 둘러봤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고,

미뤄두지 않았다.


소를 닮은 순이는, 소보다 더 우직했다.


저녁이면 구멍 난 옷가지들을 꿰매야 했지만,

그 날만은, 바늘을 내려 놓았다.


며칠 전, 작은오빠네 집에 가던 길에

소학교 동무 연이를 만났기 때문이다.

연이는 순이 보다 먼저 중학교에 진학했다.


“이거시 잉글리시라는거여, 신기하고, 솔찮이 재밌당게”

눈이 번쩍였다.


순이는 묘한 설렘을 느꼈다.


관심을 보이자 연이가 말했다.

“읍내서 저녁이나 되야 들어온디, 그래도 괜찮음

언제 집으루 와불랑가?”


열다섯. 이미 철이 들어버린 나이여서

밤늦게 남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궁금함은 참을 수 없었다.


대문을 살며시 밀고 들어서며

마당 평상에 앉아있는 연이 어머니께

꾸벅 인사를 드렸다.


친구 어머니면서 동시에 집안 어른 이였다.

‘유씨’ 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은

모두가 먼 친척 이였다.


고개를 숙이고, 사박사박 발을 조심스레 옮겨

연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부터, 순이는 밥을 하면서도

빨래를 헹구면서도 입을 움직였다.


‘CAT’, ‘DOG’

같이 낯선 단어들을 혼자 중얼거리며 외우기 시작했다.


마치 작고 반짝이는 돌멩이를 하나 주운 것처럼

낯선 단어들이 가슴속 어딘가를 톡톡

두드리는 기분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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