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전라북도 이리
봄이 막 들어선 들판엔
파릇한 보리가 얼굴을 내밀었지만,
마을은 숨 죽은 듯 고요했다.
아이들에게 이질이 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서로의 집을 피해 다니녔다.
소달구지도, 개 짓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리읍 외각의 연화리,
마을의 끝, 여섯 아이를 둔 가난한 농가.
그 집의 여덟 살 된 딸아이가
고열에 몸부림쳤다.
먹는 족족 토하고,
설사로 기운이 다 빠져 버린 상태였다.
병원은 시내에만 있었다.
이웃 중 차를 가진 이는 없었다.
시내에 나갈 수 있는 수단은
남편의 낡은 자전거 밖에 없었다.
페달은 덜컹거리고, 체인이 자주 빠지는
그 자전거만큼 살림도 형편없었다.
사시사철 논으로 들로 죽어라 일해도
먹고 살기 빠듯해서,
이제 5살난 막내까지 밭에 나와
일을 거드는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마당 한 켠에
짚으로 엮어 노란빛이 도는
거무튀튀한 색의 멍석을 깔았다.
그리고 기운 없이 축 쳐진 아이를
그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군데군데 삐죽 튀어나온 짚 끝이
여린 살갗에 닿아 아이가 작게 움찔했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였다.
밤이 되면 멍석의 나머지 반을
들어 올려 이불처럼 덮어주었다.
마른 흙과 곰팡이의 잔내가 뒤섞인
짚의 결은 뻣뻣했다.
그녀는 아이를 열하나인가,
열둘인가를 낳았다.
몇을 낳고 몇을 묻었는지 조차 가물가물 했다.
태어나자마자, 혹은
돌도 넘기지 못하고 떠난 아이들이 많았다.
봉분없는 무덤,
돌무더기 사이사이 풀씨가 날아와 앉아
계절이 바뀔 때면 이름모를 들풀이 돋아났다.
남은 아이들만이라도 살려야 했다.
밤바람이 싸늘했다.
뜨겁던 아이의 몸은 점점 차가워졌고,
숨소리는 가늘고 희미해 졌다.
며칠이 지나 앓는 소리가 들리지 않자.
어머니는 멍석위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아이가 눈을 뜨고 있었다.
깊고 검은 눈.
길고 진한 속눈썹이 또렷하게 하늘을 향했다.
물기를 머금은 말간 눈동자는
누렁소의 눈과 같았다.
그 눈이 고요하고도 묵직하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는 말이 없었지만,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들판에 보리가 다시 고개를 들 무렵.
아홉살이 된 순이는 소학교에 가게 되었다.
책가방도, 교복도 없었다.
누렇게 바랜 천 보자기에
책을 돌돌 말아 감싼 후
등 뒤로 둘러메고, 매듭은 가슴 앞에 꼭 묶었다.
몸에 딱 붙어야 달리기에 편했다.
소현국민학교는 집에서 3km 남짓.
마당을 쓸고, 소 풀을 베어다 놓고,
아침 설거지 까지 하고 나면
뛰어야 늦지 않았다.
손에 뭍은 물기를 치마에 탈탈 털며,
전력 질주로 집을 나섰다.
맨발에 끼워 신은 고무신이 자꾸 벗겨지며,
틈새로 작은 돌맹이들이 튀어 들어와
한걸음 한걸음 뛸때마다 따꼼따꼼 아팠다.
다른 아이들보다 한해 늦게 학교에 가지만,
이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아침의 분주함이나, 발바닥의 작은 통증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하는 일 들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