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외가 나오는 여름보다,
귤이 있는 겨울이 좋았다.
귤을 까먹고, 껍질을 실에 꿰어 여기저기 걸어 놓으면,
방 안 가득 귤 냄새가 번지는 게 좋았다.
심심하면 그 껍질을 꿰어 왕관처럼 머리에 쓰고,
귀부인인 척 목에 걸고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거울 앞에 서서 어깨를 으쓱이면 귤 냄새가 폴폴 올라왔다.
씻을 데가 마땅치 않았던 우리집은
여름엔 마당 수돗가에서 등목을 했는데,
바지만 입은채, 손은 땅을 집고, 엉덩이를 높이 들어 엎드리면,
엄마가 재빠르게 물을 끼얹고 비누칠을 해주었다.
나중에 그것이 부끄러운 것을 알고, 씻기 꺼려졌지만,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밤에라도 급하게 씻어야 했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한 달에 한 번쯤
여자들 끼리만 목욕탕에 갈수 있으니
그래서 겨울이 더 좋았다.
플라스틱 바구니에 수건, 비누,때타올등을 챙겨,
옷을 단단히 껴입고 비탈길을 내려갈때면
차가운 공기와 입김이 만나 아빠가 담배 연기를 피우는
모습을 흉내내며 걸었다.
“이것봐봐, 언니 아빠같지?
연기 길게 나간다.”
비탈길 중턱에 있던 유일한 목욕탕을 아직도 기억한다.
문을 열면 훅 끼쳐오는 뜨거운 김,
포근한 빨랫비누 냄새,
벗어둔 옷에서 스며나오는 겨울 냄새,
엄마는 한 달치 묵은 때를 다 벗겨내겠다는 듯
우리를 한명씩 잡고,
등이며 팔이며 구석구석을 을 박박 밀어댔다.
그때마다 회색의 때가 지우개똥처럼 말려 후두둑 떨어졌다.
“아이고, 때봐라 때~까마귀가 아이고 형님~ 하긋네.”
차례대로 붙잡혀, 이리저리 밀리다가,
살이 벌겋게 되면 그제야 풀려났다.
엄마가 씻는 동안 우리는 냉탕에 들어가 숨 오래 참기 놀이를 했다.
마지막으로 풀려난 후남이가 나도나도 하며 풍덩 들어오면,
뽀얀 엉덩이가 둥실 물위로 떠올랐다.
우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대며,
후남이 엉덩이를 물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눈이 핑 돌 때즘,
밖으로 나와 선풍기에 머리를 말리고,
깨끗한 속옷을 입으면, 새로 태어난 기분 이였다.
목욕탕 문을 나설 때,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겨울 냉기가 파고드는 그 기분이 좋았다.
한 달에 한 번 씻는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쾌감 이였다.
아빠가 있었으면 진작에 열댓 번은 혼났겠지만,
그날만은 우리끼리 실컷 웃고, 놀았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이제는 목욕탕은 못 가겠구나 생각한 적이 있다.
그렇게 따뜻했던 날들은
언제나 계절보다 더 빨리 사라져버리곤 했다.
수증기 속에서 거울에 비친 엄마와 우리,
언니와 후남이 웃음소리가 아직도 생각이 난다.
가난은 계절을 가리지 않았지만, 여름엔 특히 가혹했다.
그래서 나는 참외보다 귤이 좋았고,
내 가난의 저울은 늘 여름보다 겨울로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