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그림자 밖으로

by 맑음

순이가 스물세 살이 되던 해,

‘선’이 들어왔다.


서울에서 세탁소를 한다는 노총각이었다.

손재주가 좋아 먹고 사는 건 걱정 없다 했다.



흑백사진 속 남자.

덥수룩한 머리, 그만큼 두툼한 입술이

굳게 닫혀 있었다.


순이는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사람이랑…내가 살아야 한다고?”

“이제 너도 편하게 살아야지. “

“살림만 하면 된데”

장소가 서울로 바뀔 뿐,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대로 결혼하면,

내 인생을 살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그림자만 따라다니게 되겠지.


숨이 막혔다.



친구 경숙이, 공장에 취직하며 마을을 떠나가기 전


“오고 싶으면 와. 나는 언제든 괜찮아.”했던,


그 말이 순이의 심장을 툭, 두드렸다.

그날 밤,

순이는 조용히 짐을 쌌다.

어디로 가는지 확실치 않았지만,

단 하나는 분명했다.

“이제, 나로 살아보자.”



경숙이 일을 나가고 나면,

순이는 이불을 개고, 걸레로 방을 훔쳐냈다.


책상 위에 쌓인 책들 중

얇고 만만해 보이는 걸 골라

모르는 글자들은 소리내 읽으며

속으로 뜻을 짐작했다.


경숙의 자취방은 작고 반듯했다.

창틀과 마룻바닥은 윤이 났고,

어지럽히는 사람이 없으니

정리 할 것도 없었다.

순이는 그 조용하고도 단정한 공간 안에서,

자꾸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들이,

정말 다 ‘내 몫’이었을까.”

시골집 부엌은 늘 북적였다.

돌아서면 밥 달라는 소리,

끊이지 않는 농사일, 온갖 심부름

무덤처럼 쌓인 빨래와 꿰매야 할 옷가지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불만도 없었고,

억울하단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와 보니

내가 나서서 했던 '내몫'은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상황에 의해, 떠밀려서 한 일이었다.




억울할일도,서운할일도 없다고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다독였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 한켠이 묵직하게 저려온다.

햇살이 좋아 이불을 마당에 널고

찬거리를 사러 장에 나갔다.

이리에서는 오일장이 열려도

한달에 한 두번 겨우 가던 시장이,

이곳에서는 몇 걸음 나가면 펼쳐 졌다.

골목마다 갖가지 식재료며, 그릇가게, 옷가게들이 이어져 있으니,

주머니 사정은 넉넉지 않았지만,

구경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그때, 옷가게 유리창에 비친 얼굴이 순이를 멈춰 세웠다.

햇살 아래, 부드럽게 출렁이는 머리칼,


이마에서 코끝까지 매끄럽게 흐르는 능선,

빛을 머금은 또렷한 눈동자와

바느질하듯 단정한 입매.

그 얼굴이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마을에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착하단 말, 부지런하단 말 뿐 이었다.

그러나,

유리창 너머의 얼굴은 달랐다.

시골에는 없는 얼굴.

누구든 돌아봤을 얼굴이었다.

순이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서 오래도록 들여다 보았다.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오랜 시간,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았는지를.



순이가 다시 시장 구경에 빠져 있던 중,

골목 건너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처제!!”


고개를 들자,

회색 와이셔츠를 단정히 여민 키 큰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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