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感' - 지젝의 시선으로

8편(완결): 말할 수 없는 것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

by 엉클디

우리는 이제, 철학이 우리에게 진리의 문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균열을 보여주는 일임을 안다.

스펜서의 불가지론은 실재가 ‘접속 불가능’한 서버임을 보여주었고,

칸트의 물자체는 인식 구조의 불가능한 경계를 설정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의 침묵은 언어의 이면을 가리켰고,

화이트헤드는 고정된 존재가 아닌 생성의 흐름 속에 실재를 위치시켰다.

불교의 무아는 ‘나’조차도 환영이라는 것을 깨우쳐주었다.

그리고 지젝은 우리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사유들을 한데 끌어모아, 이렇게 외친다:

“진짜 실재는 실패다!”

“진짜 앎은 모름이며, 진짜 존재는 부재다.”

그러니 묻자. 이러한 역설을 짊어진 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불안정성의 수용 — “그렇다, 나는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시작할 수 있다.”

실재는 항상 과잉이며, 언어는 그것을 포획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한다.

왜?

말할 수 없는 것이 우리를 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확립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내가 아님을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 질문하는 존재로 서 있어야 한다.

‘나’는 하나의 구멍이자, 실패이며, 지연된 탄생이다. 그 구멍을 채우려 하지 말고, 그 구멍에서 살아야 한다.

윤리의 전환 — “결핍이 너를 책임지게 한다.”

자아는 없다. 아니, 있지 않음으로 존재한다.

무아는 해탈의 기술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자리 비움이다.

윤리란 “내가 옳기 때문에”가 아니라,

“나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기반한다.

그것이 비트겐슈타인이 남긴 침묵의 윤리이자, 칸트의 실재를 향한 결단이다.

정치적 실천 — “불완전함으로 세상을 가로지르는 자가 되라.”

이 세계는 과잉된 말, 과잉된 앎, 과잉된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잉 뒤에, 여전히 말해지지 않은 것, 응답되지 않은 고통,

해결되지 않은 구조의 균열이 남아 있다.

지젝은 말한다.

“실재는 언제나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도착하지 않음이 바로 현실을 지배한다.”

그러니 우리는 그 도착하지 않는 실재를 향해 응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지식인은 ‘아는 자’가 아니라, ‘모른다는 것을 끝까지 견디는 자’이다.

그 견딤 속에서 우리는,

자기-중심적 인간이 아닌, 실재-중심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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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것들, 인식할 수 없는 실재, 실패하는 생성, 존재하지 않는 자아…

이 모든 것이 ‘절망’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형식에 대한 초대라면 어떠한가?

우리는 이제, 명확히 알 수 있다.

삶이란 앎의 총합이 아니라, 모름의 균열을 따라 가는 실천이다.

그리고 그 실천은 단순한 반성적 철학이 아니라,

정치이고, 사랑이며, 죽음을 포함하는 존재의 총체적 응답이다.

지젝은 침묵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언어가 실패한 자리에서, 그 실패를 말함으로써,

철학의 새로운 윤리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말해야 한다.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나를 말하게 한다.

자아는 없다. 그러나, 그 부재 속에서 나는 타자에게 응답한다.”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이유다.

말함이 아니라, 함께 함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그리하여, 실재의 균열 속에 삶을 놓아두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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