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디자인이 실패하는 일곱 가지 방법
「공공디자인 진흥법」을 읽어보라. "삶의 질 향상", "포용", "접근성", "안전"이라는 말들이 줄줄이 나온다. 이 얼마나 숭고한 말들인가! 그런데 이상하다. 이 모든 말들이 하나같이 공허하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만큼 비어있다.
삶의 질이 뭐란 말인가? 누가 결정하는 건가? 법조문은 떠들어대지만 정작 현실의 어떤 상황도 건드리지 못한다. 진짜 공공이란 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만 태어나는 법인데 말이다.
법은 존재한다. 하지만 현실은 조직하지 않는다. 그저 '공공'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껍데기만 남겨놓을 뿐이다.
공무원들에게는 매뉴얼이 있다. 이해-구축-실행-공유-활용이라는 완벽한 단계별 프로세스 말이다. 보기에는 그럴듯하다. 문제는 이게 사람을 기계로 만든다는 점이다. 공무원은 '공공'이 뭔지 상상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절차만 따르면 된다. 질문은 사라지고 답변만 남는다. 이게 바로 관료제의 승리 아닌가!
그래서 디자인은 증발하고 찌꺼기만 남는다. 보고서용 사진, 회의록, 행정 서류들. 공공디자인이라더니 공공은 없어지고 디자인만 남았는데, 그 디자인마저 시체가 되어버린다.
"시민참여 디자인"이라니, 들으면 가슴이 뛴다! 그런데 실상을 보면 참여는 착취다.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아이디어를 짜내고는 끝이다. 그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CPDG(시민참여디자인거버넌스)가 실패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참여 이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연출할 뿐 민주적인 일은 하지 않는다. 시민은 사라지고 "동원된 얼굴들"만 남는다.
최저가 낙찰제라니! 공정하다고? 천만에! 이건 빈곤을 제도화하는 방식이다. 지속가능한 디자인은 예산에서 탈락하고, 혁신은 기획 단계에서 제거된다. 공공디자인 사업은 전략이 아니라 생존게임이 되어버린다.
예산은 있지만 비전은 없다. 계약은 있지만 책임은 없다. '디자인 리더'는 발언권을 잃고 '견적 제출자'로 전락한다. 모두가 규칙을 따랐으니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Perfect!
탄소중립이니 기후위기니 하면서 뭘 하는가? 도시 컬러를 정하고 일회용 벤치를 만든다. 이 모든 '친환경'은 소비사회의 면죄부에 불과하다. 환경을 치유하는 게 아니라 장식하는 것이다.
그린워싱이라는 말조차 스스로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착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이런 무의식적 자기기만이야말로 진짜 위선이다.
AI, 센서, 빅데이터로 무장한 스마트시티! 그런데 이 도시는 조금도 똑똑하지 않다. 오히려 점점 말을 잃어간다. 스마트벤치는 위치를 기록하고, CCTV는 시선을 수직화한다. 인간은 인터페이스가 되고, 모든 존재는 '데이터 생산점'으로 축소된다.
스마트함이란 예측 가능성에 대한 욕망이다. 하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존재다. 공공디자인이 그 예측 불가능성을 제거하려 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공공을 말할 수 없다.
장애인, 노인, 어린이, 이주민, 여성... 모두를 위한 디자인! 얼마나 이상적인가! 그런데 그 '모두'는 평균이다. 그 평균이야말로 권력의 표현이다. 평균은 '정상성의 폭력'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이 오히려 '특정한 몸들'을 지운다.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이동하고, 다르게 존재하는 몸들을. 그런데 우리는 그 다름을 '포용'한다는 이름으로 흡수해버린다. 지우는 것은 삭제보다 무섭다. 존재를 인정한 후 제거하는 이데올로기적 기술이니까.
공공디자인이 실패하는 이 일곱 가지 방식은 단순한 행정 미비나 제도 오류가 아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완성된 형태다. "우리는 공공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확신이야말로 그 공공의 부재를 가장 철저하게 은폐하는 것이다.
진짜 공공디자인이 있으려면, 이제 '무엇을 디자인할 것인가'가 아니라 '누가 디자인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권한 없는 자들의 권력 없는 상상력, 그들이야말로 진짜 '공공'을 열 수 있다. 공공디자인은 공간을 꾸미는 기술이 아니라 권력의 사용방식을 재편하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공공은 없다. 하지만 공공은 만들어질 수 있다. 그것은 기존의 모든 시스템 바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