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는 공간이 말하는 것

도시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

by 엉클디

1. 사라진 광장, 혼자가 된 사람들

코로나19 이후 우리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배달앱과 온라인 쇼핑이 일상이 되면서, 사람들과 직접 만나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죠. 예전 이탈리아 도시의 광장처럼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고 대화하던 공간들이 지금은 배달 박스와 광고판으로 가득한 임시 물류창고 같은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서울시가 2024년 하반기에 '매력적이고 포용적인 도시' 만들기를 발표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인데도 정작 서로 고립되어 있고, 온라인으로는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단절되어 있다는 모순적인 현실 때문입니다.

426399_238009_503.png


이 정책은 작은 공유정원을 만들고, 거리에 돌봄 공간을 설치하고, 거동이 불편한 분들을 위한 보행로를 넓히는 등 36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합니다. 핵심은 도시의 '빈 공간'을 단순히 비어있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장소로 바꾸는 것입니다. 시민들이 소비자가 아닌 도시를 함께 가꾸어가는 사람으로 자리잡을 때, 비어있던 공간은 사회적 돌봄의 에너지가 흐르는 중심지가 됩니다.



2. 동양철학에서 배우는 '사이'의 지혜


동양철학에는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습니다. 노자는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하는 무위(無爲)를, 장자는 비어있음과 채워짐이 서로 보완하는 허실(虛實)을, 공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仁)을 말했습니다.

이런 개념들은 모두 '나 대 너'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서, 서로 얽혀있고 함께 성장해나간다는 생각을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관계 중심의 사고가 때로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동시에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키워준다는 긍정적인 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각자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서로의 성장을 도와주는 '사이 공간'에서 살아갈 때, 공공성이라는 것도 일방적인 규칙이 아니라 서로 조율해가는 공명(共鳴)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것도 관계를 디자인하는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벽으로 막힌 도시, 닫힌 마음


중국의 도시 연구를 보면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납니다. 가족이나 친구 관계로 이루어진 좁은 서클 밖의 공간을 '낯선 이의 영역'이라고 부르면서, 외부인을 막기 위해 벽과 바리케이드를 계속 설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좁은 골목에 설치된 일방통행 철문, CCTV와 QR코드 인증 시스템 같은 것들이 안전을 위한 장치라고 하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는 심리적 장벽 역할도 합니다.

이런 경계선들이 많아질수록 사회적 신뢰는 각자의 사적 영역으로만 축소되고, 공공의 빈 공간은 점점 줄어듭니다. 따라서 도시계획은 단순히 물리적인 담장을 없애는 것을 넘어서, 낯선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환경'을 만드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4. 여성의 눈으로 본 도시 - 누구를 위한 설계인가?


9788932922522.jpg


레슬리 컨이 쓴 《페미니스트 시티》라는 책은 도시 구조가 전통적인 성 역할을 전제하고 주로 남성의 이동과 안전을 중심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지하철 환승 통로가 너무 어둡거나, 공원 벤치의 팔걸이가 너무 낮거나, 새벽 버스 배차 간격이 너무 길다든지 하는 것들이 일상에서 여성의 이동권이나 휴식권을 제약합니다.

2024년에 발표된 페미니스트 공공도서관 연구는 조명을 고르게 배치하고, 소음을 줄이고, 위계적 분위기를 최소화해서 '있어도 괜찮은 공간'을 만들자고 제안합니다. 이는 이용자에게 소유권이 아닌 '머물 권리'를 제공하며, 공공공간을 돌봄의 생태계로 확장합니다.

디자이너들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의 관점, 즉 사용하는 사람의 실제 경험에 초점을 맞춰 도시를 다시 배치할 필요가 있습니다.



5. 돌봄의 윤리로 만드는 따뜻한 도시


12357_15161_4013.jpg


페미니스트 철학에서 말하는 돌봄의 윤리는 우리가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해방적 돌봄' 모델은 공공공간을 감정적 안전, 물리적 접근성, 사회적 인정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실내외 온도차를 줄이고, 여러 가지 접근 경로를 만들고, 시각적·청각적 신호를 명확하게 해서 불안 요소를 미리 차단하는 것입니다.

공공벤치에 설치된 긴급 신고 버튼, 복합문화공간의 생리용품 비치함,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블록 같은 것들이 돌봄 인프라의 실제 사례입니다. 이런 장치들은 단순히 '취약계층 보호'를 넘어서 '공공이 모두를 위한 안전망'이라는 공동의 믿음을 만들어갑니다.



6. 앞서가는 도시들의 실험


비엔나와 바르셀로나는 성별을 고려한 도시계획을 통해 벤치의 높이, 간격, 등받이 각도까지 다시 설계하면서 세밀한 돌봄 네트워크를 구축해왔습니다.

2024년 에든버러 시의회는 '젠더 예산'을 도입해서 겨울철 제설 작업의 우선순위를 보행자, 유모차 이용자, 노년층의 생활 동선으로 바꿨습니다. 같은 해 스웨덴 우메오시는 미투 운동 이후 공공성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의미로 광장 중앙에 'Listen'이라는 청동 조각을 설치하고, 시민참여 워크숍을 통해 공원 조명, 안내판, 대중교통 안전 시스템을 전면 개편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도시 행정이 일방적인 관리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배워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페미니스트 도시계획은 '소수자를 위한 특혜'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기준 향상'이라는 공공의 가치로 이어집니다.


79484_91429_3721.jpg 유니버설 디자인 웨이파인딩 시스템 적용 이미지. (사진=현대건설)출처 : 우먼타임스(http://www.womentimes.co.kr)



7. 한옥 마당과 안전지대의 공통점


한옥의 마당은 높은 외벽으로 차단하지 않고 기단과 처마로 경계를 만들어서 시선과 바람, 소리가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합니다. 여성주의 디자인이 추구하는 안전지대도 마찬가지로 폐쇄적인 감시가 아닌 투명하고 서로 보이는 시선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만들어냅니다.

두 가지 모두 '텅 빈 중심'이 머물고 돌보는 잠재력을 가진 장소로 작동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몸의 방향, 소리의 울림, 시선의 흐름을 고려한 공간 구성은 사용자의 예측 가능성과 통제감을 높여줍니다.

이런 투명한 틈새 공간은 '우연한 우정'과 '즉흥적인 협력'이 생겨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며, 도시 공동체 감각을 다시 살려냅니다.



8. 공공디자인을 위한 다섯 가지 원칙


첫째, 관계를 만드는 배치: 움직일 수 있는 가구와 조립식 플랫폼을 통해 사용자가 필요에 따라 공간을 임시로 바꿀 수 있도록 합니다.


둘째, 의도적인 비움: 상업적 기능보다 사람들의 교류를 우선시하며, 시민이 직접 프로그램을 제안할 수 있는 공공 무대를 만듭니다.


셋째, 부드러운 경계: 시각장애인, 고령자, 성소수자 등 다양한 사용자의 이동 경로를 자연스럽게 연결해서 '존재를 증명할 필요 없는 공간'을 실현합니다.


넷째, 여러 목소리의 조화: 유아차, 휠체어, 느린 보행자를 위한 리듬 조절을 통해 차이를 조율하며, 보행 네트워크의 사회적 음악성을 확장합니다.


다섯째, 돌봄 신호체계: 온도, 조명, 음향, 안전벨이 하나의 일관된 감각 언어를 만들도록 설계해서, 사용자에게 물리적 안정감뿐 아니라 정서적 연대감을 경험하게 합니다.


이런 실천은 설계, 행정, 시민행동이 연결된 지속적인 과정으로 구체화되는 '비판적 공간 만들기'의 실현입니다.



9. 공공은 서로 돌보는 실천이다


비어있는 공간은 상품을 진열하는 곳이 아니라 '관계의 숨구멍' 역할을 합니다. 동양철학의 '빔(空)'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여백이고, 여성주의 디자인의 '돌봄'은 서로 의존하는 인프라입니다.


이 두 가지 사고가 만날 때, 공공은 '소유를 두고 다투는 전장'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기반'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 시민들이 이 생각을 공유하고 실행할 때, 텅 빈 곳은 더 이상 부족함이 아니라 가능성의 무대로 확장됩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공성은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포용하는 돌봄의 실천으로 귀결됩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공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