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의 새로운 안전디자인의 철학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며 우리는 눈부시게 밝은 조명과 곳곳에 설치된 CCTV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여성안심구역'이라는 분홍색 표시와 '범죄예방조명'이라는 안내판도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우리를 더 안전하게 만들고 있을까? 아니면 누군가를 보이지 않게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권력이 더 이상 직접적인 억압이 아니라 일상의 미묘한 통제로 작동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안전'이라고 부르는 지하철 공간의 변화들이 실제로는 누군가의 존재를 지우고, 특정한 방식으로만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새로운 권력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범죄예방환경설계(CPTED)는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개념이다. 간단히 말하면 '공간을 잘 설계하면 범죄를 미리 막을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어두운 골목보다 밝은 길이 안전하고, 사각지대보다 잘 보이는 곳이 범죄가 적게 일어난다는 상식적 판단에서 출발했다.
한국에서도 20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했고, 특히 서울 지하철역에는 2020년대 들어 대대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조명을 밝게 하고, CCTV를 촘촘히 설치하며, 시야를 가리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벤치는 점점 경사지게 만들어져 누워있기 어려워졌고, 중간중간 팔걸이가 설치되어 긴 시간 머물기 불편하게 되었다. 이는 노숙인이나 장시간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밀어내는 효과를 만든다.
"누구를 위한 안전인가?" 이것이 핵심 질문이다.
현재의 CPTED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특정 집단을 미리 '위험 인물'로 간주하고 공간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노숙인, 취업준비생, 이주민 등 장시간 공공장소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부적절한 존재'로 취급받게 된다.
둘째, 감시 시스템이 강화되면서 시민들의 일상이 더욱 투명하게 노출된다. 범죄 예방이라는 명목이지만, 실제로는 개인의 사생활과 자유로운 움직임이 제약받는 결과를 낳는다.
셋째, 범죄의 근본 원인은 외면한 채 공간의 문제로만 환원시킨다. 빈곤, 실업, 주거 불안정 등 구조적 문제는 그대로 둔 채 "그 공간이 어두워서 문제다"라는 식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핵심은 '통제'에서 '돌봄'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이다.
포용적 공간 설계부터 시작해보자. 노숙인도 고령자도 임산부도 편안히 쉴 수 있는 가변형 좌석을 만들고, 다양한 신체 조건을 고려한 공간을 설계(유니버설디자인)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포함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커뮤니티 참여 프로그램도 중요하다. 은퇴한 어르신, 지역 예술가, 자원봉사자들이 지하철역을 순회하며 시민들과 소통하는 '스튜어드'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다. 이는 CCTV나 경비원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효과적인 안전망이 될 것이다.
참여형 설계 과정도 필요하다. 공간을 실제로 이용하는 다양한 시민들이 처음 설계 단계부터 참여해 자신들의 필요와 경험을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전문가들만의 탁상공론이 아닌 진짜 이용자들의 목소리가 담긴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아이디어들을 실제로 적용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 속 '서면역 리퍼블릭 스테이션'을 그려보자.
이곳의 벤치는 필요에 따라 길이와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 반투명 파티션은 시야는 확보하면서도 적당한 사적 공간을 보장한다. 지역 예술가들이 만든 미디어 아트 조명은 단순히 밝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화하며 감성적 안정감을 준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스튜어드'라는 특별한 존재가 있다. 이들은 경비원이 아니라 시민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사람들이다. 하루 세 번 역을 돌며 불편한 것은 없는지, 도움이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묻고, 작은 문제들을 해결해준다. 이런 활동들은 모두 기록되어 시민들과 공유되며, 공간이 어떻게 개선되고 있는지 투명하게 알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안전은 무엇일까? 범죄자를 미리 색출해 배제하는 것일까, 아니면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일까?
진정한 공공공간은 누군가를 배제하는 곳이 아니라 모두를 포용하는 곳이어야 한다. 지하철역은 단순히 이동의 통로가 아니라 도시인들이 만나고 쉬고 소통하는 삶의 공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밝은 조명이나 더 많은 CCTV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돌보는 마음이다. 그때 비로소 도시는 진정으로 안전하고 살기 좋은 곳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밝음이 곧 안전이라는 공식을 넘어서,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공간에 담아낼 때가 되었다. 지하철역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가 우리 도시 전체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