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무경으로 느끼는 공공디자인

존재론적 전환을 위한 철학적 탐구: 디자인은 존재하는가, 혹은 인식되는가

by 엉클디

서론: 디자인 존재론의 위기와 불교 철학적 해법


현대 공공디자인 담론은 근본적인 존재론적 모순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공공공간의 벤치, 가로등, 보도블록, 사인시스템을 마치 자명한 실체인 양 다루지만, 정작 그것들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비판적 실재론은 공공디자인을 단순한 물리적 배치의 문제로 환원시키며, 디자인이 갖는 본질적 역동성과 관계성을 은폐한다.

8세기 불교 유식학파의 핵심 명제인 '유식무경(唯識無境)'은 이 같은 디자인 존재론의 난제에 대해 혁신적인 철학적 틀을 제공한다. 유식무경은 "오직 인식만 있을 뿐,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외부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주객 이분법을 넘어선 관계적 존재론을 제시한다. 이는 디자인을 '만들어진 사물'에서 '체험되는 과정'으로, '고정된 형태'에서 '유동하는 관계'로 재개념화할 수 있는 철학적 근거를 마련한다.

본 글은 유식무경의 철학적 통찰을 통해 공공디자인의 존재론적 전환을 모색한다. 이를 통해 디자인이 단순한 형태 구현을 넘어 '공공적 존재 방식'의 실천이 될 수 있음을 논증하고자 한다.


유식학과 디자인 철학: 인식론적 전환의 필요성


전통적 디자인 패러다임의 한계

전통적 공공디자인 방법론은 데카르트적 주객 이분법에 기반한다. 디자이너는 주체로서 공간을 객체화하고, 사용자의 필요를 분석하여 최적의 형태를 도출한다는 선형적 사고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접근법은 디자인을 '문제 해결의 도구'로 환원시키며, 공간과 사용자, 환경과 개체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간과한다.

특히 한국의 공공디자인 정책은 여전히 '표준화'와 '규격화'에 의존한다. 2007년 시작된 '공공디자인 진흥 종합계획'은 통일된 색채, 표준화된 사인시스템, 일관된 가로시설물 배치를 통해 도시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디자인을 사물의 속성으로 고착화하며, 사용자의 다양한 체험 맥락을 배제한다.


유식학의 8식 구조와 디자인 체험의 층위

유식학은 인간의 인식을 8가지 층위의 식(識)으로 구분한다: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의 오감, 의식(意識)의 통합적 판단, 말나식(末那識)의 자아 의식, 그리고 아뢰야식(阿賴耶識)의 근본 저장 의식이다. 이 구조는 디자인 체험이 단순한 시각적 인지를 넘어 다층적이고 통합적인 과정임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서울 청계천의 야간 조명 디자인을 체험하는 과정을 분석해보자. 시각적으로는 LED의 색온도와 명도 변화가 인지되고(안식), 청각적으로는 물소리와 도시 소음의 대비가 감지되며(이식), 촉각적으로는 난간의 차가운 금속 질감이 전달된다(신식). 이러한 감각적 정보는 의식에서 '도심 속 자연'이라는 의미로 통합되고, 말나식에서는 '도시인으로서의 나'라는 정체성과 연결되며, 아뢰야식에서는 과거의 자연 체험과 현재의 인공 환경이 중층적으로 교직된다.

이는 디자인이 단일한 감각 채널이 아닌 다층적 인식 구조를 통해 구성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공디자인은 감각의 통합적 조직화를 고려해야 하며, 이는 유식학의 '전식득지(轉識得智)' 개념, 즉 일반적 인식을 지혜로 전환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무경(無境)의 함의: 디자인에서 객관성의 해체

유식무경에서 '무경'은 객관적 외부 대상의 부재를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관념론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가 상호 구성적 관계에 있음을 뜻한다. 디자인 맥락에서 이는 "디자인된 공간 그 자체"라는 고정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사용자와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디자인이 현현함을 의미한다.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는 이러한 무경 개념의 실천적 사례다. 폐선된 고가철도를 공원으로 전환한 이 프로젝트에서 디자인은 고정된 형태가 아닌 시간의 흐름, 계절의 변화, 식생의 성장, 방문자의 행태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설계자 제임스 코너(James Corner)는 "우리는 공원을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변화의 조건을 디자인했다"고 말했다. 이는 디자인을 고정된 결과물이 아닌 변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유식학적 관점과 일치한다.


공공성의 재구성: 개체에서 관계로


전통적 공공성 개념의 한계

근대적 공공성 개념은 개인과 집단,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명확한 구분을 전제한다.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이나 아렌트의 '정치적 공간' 개념은 모두 주체들 간의 소통과 참여를 강조하지만, 여전히 개별적 주체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공공디자인은 개별 주체들의 공통 필요를 충족시키는 중립적 매개체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는 공공성을 과도하게 추상화하며, 실제 도시 공간에서 발생하는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상호작용의 복잡성을 포착하지 못한다. 특히 다문화, 다세대, 다계층이 중첩되는 현대 도시에서 '공통의 필요'라는 것 자체가 허구적 가정일 수 있다.


유식학의 관계적 존재론과 공공성

유식학에서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 즉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 개별 주체나 객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관계의 조건 속에서만 현현한다. 이는 공공성을 개체들의 집합이 아닌 관계들의 역동적 구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도쿄 시부야의 스크램블 교차로는 이러한 관계적 공공성의 전형이다. 매일 50만 명이 교차하는 이 공간에서 공공성은 미리 설정된 규칙이나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보행자들의 속도, 방향, 밀도의 실시간 변화가 만들어내는 집합적 흐름 자체가 공공성의 내용이 된다. 신호등의 타이밍, 보도의 폭, 건물의 배치는 이 흐름을 조절하는 변수일 뿐, 공공성을 결정하는 것은 관계의 총체다.


감응적 디자인: 아뢰야식과 집합적 무의식

유식학의 아뢰야식 개념은 개인적 무의식을 넘어 집합적 기억과 경험의 저장고를 가리킨다. 이는 공공디자인이 개별 사용자의 의식적 필요뿐만 아니라 집합적 무의식, 문화적 기억, 역사적 트라우마와도 조응해야 함을 시사한다.

광주의 5·18 민주광장 재정비 사업(2018)은 이러한 접근법의 사례다. 설계팀은 단순히 기념비나 조형물을 배치하는 대신, 광장의 바닥 패턴, 조명의 리듬, 식재의 배치를 통해 1980년의 집합적 기억을 현재의 일상 속에 스며들게 했다. 방문자들은 명시적으로 역사를 '학습'하지 않아도 걷고, 앉고, 머무르는 행위 자체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중첩된 시간성을 체험한다.


감응성과 기술: 디지털 환경에서의 유식적 디자인


IoT와 감응적 공간의 출현

사물인터넷(IoT) 기술의 발전은 공공공간을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감응적 환경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는 여전히 기능주의적 효율성에 집착하며, 센서 데이터의 수집과 분석을 통한 최적화에 머무른다. 이는 기술을 수단으로, 공간을 대상으로 객체화하는 전통적 사고의 연장이다.

유식학적 관점에서 진정한 감응성은 단순한 반응성을 넘어 상호 구성적 관계를 의미한다. 공간과 사용자, 환경과 기술이 서로를 변화시키며 새로운 존재 방식을 창발시키는 것이다.


서울시 DDP 미디어파사드의 유식학적 해석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미디어파사드는 건물 외벽에 설치된 45,133개의 LED를 통해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영상을 구현한다. 표면적으로는 기술적 스펙터클에 불과해 보이지만, 유식학적 관점에서 분석하면 흥미로운 존재론적 실험이다.

이 시스템에서 건물은 더 이상 고정된 형태가 아니다. 시간대, 계절, 날씨, 주변 교통 상황, 소셜미디어의 실시간 데이터가 알고리즘을 통해 시각적 패턴으로 번역되며, 건물의 '표정'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일방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지나가는 시민들의 스마트폰 사진, SNS 포스팅, 체류 시간 등이 다시 데이터로 수집되어 다음 번 영상 생성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유식학의 '알라야식' 개념과 유사하다. 개별적 경험들이 집합적 무의식에 축적되고, 이것이 다시 새로운 경험의 조건이 되는 순환 구조 말이다. DDP의 미디어파사드는 도시의 '집합적 알라야식'을 시각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AI와 디자인: 기계학습의 유식학적 함의

최근 AI 기반 디자인 도구들의 발전은 디자인 생성 과정 자체를 변화시키고 있다. ChatGPT, Midjourney, Stable Diffusion 등의 도구들은 방대한 데이터 학습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형태를 생성한다. 이는 전통적인 '작가적 주체'의 개념에 도전한다.

유식학적 관점에서 이러한 AI 시스템은 '종자(種子)'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종자는 아뢰야식에 저장된 잠재적 경험들로, 적절한 조건이 갖춰지면 현실로 현현한다. AI가 학습한 무수한 이미지와 텍스트는 일종의 '디지털 종자'로, 프롬프트라는 조건을 만나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디자인의 창작 주체가 개별 디자이너에서 인간-기계-데이터의 복합적 어셈블리지로 변화함을 의미한다. 미래의 공공디자인은 이러한 하이브리드 창작 환경을 전제로 구상되어야 한다.


사례 연구: 감응적 공공디자인의 실천


코펜하겐 '슈퍼킬렌': 다문화적 연기의 실현

덴마크 코펜하겐의 '슈퍼킬렌(Superkilen)' 프로젝트는 유식학적 관계성의 도시적 실현이다. 이 공원은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구역에는 주변 거주민들의 출신국에서 가져온 다양한 오브제들이 배치된다. 터키의 의자, 중국의 네온사인, 팔레스타인의 올리브나무, 자메이카의 복싱 링까지 60여 개국의 108개 오브제가 하나의 공간에 공존한다.

중요한 것은 이 오브제들이 단순한 전시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각각은 해당 커뮤니티 구성원들의 실제 사용을 위해 설치되었으며, 일상적 실천을 통해 의미가 생성된다. 터키 커뮤니티는 실제로 터키식 의자에서 차를 마시며 체스를 두고, 태국 커뮤니티는 태국식 운동기구를 사용한다.

이는 유식학의 '제법무아(諸法無我)' 원리의 공간적 구현이다. 각 문화적 요소들은 독립적 정체성을 갖지 않으며, 오직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터키식 의자는 중국식 파빌리온 옆에 있을 때 다른 의미를 갖고, 자메이카 복싱 링과 인접할 때 또 다른 맥락을 형성한다.


싱가포르 '가든스 바이 더 베이': 인공과 자연의 무분별

싱가포르의 '가든스 바이 더 베이'는 인공과 자연, 기술과 생태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프로젝트다. 18개의 '슈퍼트리(Supertree)'는 25-50미터 높이의 인공 구조물이지만, 실제 식물들이 수직으로 자라나는 생태계를 구성한다. 이 구조물들은 태양광 에너지를 수집하고, 빗물을 저장하며, 야간에는 LED 조명과 음악으로 미디어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유식학적 관점에서 이는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실현이다. 인공/자연, 기계/생물, 기능/미학의 구분이 무화되고, 새로운 존재 방식이 창발한다. 방문자들은 이 공간에서 전통적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없는 체험을 하게 된다. 나무인가 건물인가, 자연인가 기술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서울 청계천: 시간성과 기억의 중층화

서울 청계천 복원 사업은 논란이 많았지만, 유식학적 관점에서 흥미로운 시간성의 실험이다. 이 공간에는 조선시대의 자연 하천,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시대의 복개천, 21세기의 인공 하천이 시공간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아뢰야식의 '종자 현행(種子現行)' 개념으로 보면, 청계천의 각 역사적 층위는 현재에도 잠재적으로 작동한다. 복개 이전의 자연 지형은 현재의 물길 설계에 영향을 미치고, 산업화 시대의 기억은 보존된 다리와 벽화를 통해 현현하며, 미래의 가능성은 LED 조명과 디지털 미디어 아트를 통해 암시된다.


정책적 함의: 유식학적 공공디자인을 위한 제언


디자인 프로세스의 전환

현행 공공디자인 정책은 '계획-설계-시공-관리'의 선형적 프로세스를 따른다. 이는 결과 중심의 사고로, 완성된 형태를 목표로 한다. 유식학적 접근은 이를 순환적이고 개방적인 과정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구체적으로는 '감응적 프로토타이핑' 방법론을 제안한다. 초기 단계에서 완성된 디자인을 확정하는 대신, 다양한 조건과 상황에 반응할 수 있는 '가능성의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이후 실제 사용 과정에서 수집되는 데이터와 피드백을 통해 지속적으로 진화시킨다.


평가 기준의 재정립

현재의 공공디자인 평가는 주로 시각적 만족도, 기능적 효율성, 시설물의 내구성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유식학적 관점에서는 '관계성', '감응성', '변화가능성'이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특정 벤치의 성공 여부를 단순히 '앉기 편한가'로 판단하는 대신, '다양한 연령층과 신체 조건의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 '주변 환경과 어떤 상호작용을 만들어내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평가해야 한다.


디자이너 교육의 전환

유식학적 공공디자인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디자이너 교육 방식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형태 생성 능력보다는 관계 인식 능력, 문제 해결 기술보다는 상황 감응 능력 기르는 교육이 우선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명상과 마음챙김 실습을 디자인 교육에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이는 단순한 심리적 안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식학의 핵심인 '마음의 작용'을 직접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한 실천적 방법이다. 디자이너가 자신의 인식 과정을 성찰할 수 있어야 타인의 인식 과정도 섬세하게 고려할 수 있다.


결론: 공공디자인의 존재론적 전환을 향하여


유식무경의 철학적 통찰은 공공디자인을 '만들어진 사물'에서 '생성되는 관계'로, '고정된 형태'에서 '변화하는 과정'으로 전환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한다. 이는 단순한 방법론의 개선을 넘어 디자인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의 전환을 요구한다.

미래의 공공디자인은 더 이상 '아름다운 사물'이나 '편리한 시설'의 창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민들의 일상적 삶이 전개되는 관계의 조건을 섬세하게 조율하는 작업이다. 개별 주체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 주체들 간의 새로운 연결 가능성을 창발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기술적 혁신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디자인을 바라보는 철학적 관점의 근본적 변화를 전제한다. 유식학의 '전식득지(轉識得智)' 개념처럼, 일반적 인식을 지혜로 전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디자이너는 형태의 창조자가 아니라 관계의 촉진자,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가능성의 조직자 자신의 역할을 재정의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유식학적 공공디자인은 '공공적 존재론'의 실천이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함께 존재할 것인지, 어떻게 서로 다른 차이들이 조화로운 공존을 이룰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적 탐구다. 이 과정에서 디자인은 단순한 전문 영역을 넘어 사회적 실천의 한 형태가 되며, 보다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공공성의 구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도시의 복잡성과 다양성 앞에서, 우리에게는 새로운 철학적 도구가 필요하다. 유식무경의 통찰은 그 도구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를 단순한 이론적 참조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디자인 실천을 통해 검증하고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공공디자인은 진정으로 '공공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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