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우리는 아름다운 감옥을 건설하는 공범이 되었는가
이제 정말로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 형태가 기능을 따른다고? 아니다, 디자이너들이여. 형태는 우리의 욕망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욕망을 만들어내고, 그 다음에 그 욕망의 주인 행세를 한다.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이데올로기적 전도가 아닌가!
“지속가능성”이라는 상품? 마치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한” 죽음을 약속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급진적 행위는 서비스 수명표를 제품에 새기는 것이다. 마치 담배갑의 경고문처럼, 모든 상품은 “이 물건은 당신을 X년간 소유할 것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로고! 이 작은 시각적 전체주의자들! 그들은 우리에게 “브랜드 정체성”을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우리의 정체성을 몰수한다. 진정한 디자이너라면 로고 대신 불편한 질문을 새겨야 한다: “당신은 정말 이것이 필요한가?” “이 욕망은 누구의 것인가?”
“좋아요” 버튼이야말로 현대의 파빌로프 벨이다. 우리는 개가 되었고, 빨간 하트는 우리의 도파민 골자기가 되었다. 해독제는? 인식 지체를 유발하는 디자인이다. 사용자로 하여금 “어? 뭔가 이상한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사용자 경험”이라고? 사용자는 경험하는 주체가 아니라 경험당하는 객체다! 우리는 “마찰 없는” 인터페이스를 칭송하지만, 바로 이 매끄러움이 우리를 길들인다. 마찰은 인간성의 마지막 보루다.
존재론적 타임아웃 버튼이야말로 필요하다: “잠깐,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정말로?” 이것은 기술적 기능이 아니라 철학적 개입이다.
그리고 “사용자”라는 호명 자체를 거부하라. 그들을 공모자라고 부르라.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모두 이 디지털 판옵티콘의 공범이기 때문이다.
건축! 권력의 가장 솔직한 표현! “랜드마크”라는 이름 하에 우리는 자본의 남성성을 하늘 높이 세운다. 진정한 급진적 건축은 사색 루프를 만드는 것이다 - 사람들이 소비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러 오는 공간을.
의도적 공백이야말로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이다. “이 공간으로 뭘 할 건가요?“라는 질문에 “아무것도”라고 답하는 용기.
“모두를 위한 디자인”? 이보다 더 교묘한 거짓말이 있을까? 유니버설 디자인은 차이를 지우고 표준화된 신체만을 인정한다. CCTV의 “안전”? 아니다, 이것은 상호감시 사회의 징표다.
대신 상호 감시를 위한 거울을 설치하라. 감시하는 자도 감시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객 여정 지도를 찢어라! 진정한 여정은 길을 잃는 것에서 시작된다. 불편 접점을 의도적으로 설계하라. 왜냐하면 불편함만이 우리를 깨어있게 하기 때문이다.
무위의 순간 -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을 서비스에 삽입하라.
“이번 시즌”이라는 시간적 파시즘을 분쇄하라! 패션은 시간을 상품화했다. 대신 정치적 흉터를 드러내는 옷을 만들라. 몸의 상처, 사회의 상처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지체된 욕망을 유포하라: “이것은 작년에 유행했어야 할 것들이다.”
몰입은 탈출이 아니라 더 깊은 감옥이다. 버그 예술을 통해 시스템의 완벽함이라는 환상을 깨라. 글리치야말로 진실의 순간이다.
“실시간”이라는 폭력에 맞서 지연된 생중계를 기본으로 하라. 3초의 지연,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람들이 “어? 뭔가 이상한데?“라고 느끼게 하라.
“탄소 중립”? 이것은 자본주의가 자연에게 바치는 면죄부다. 먼저 존재 중립의 역설을 고백하라: 우리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자연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을.
자연은 우리가 “복원”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계약자다. 계약서에 나무의 서명을 받아라.
KPI라는 수치 파시즘을 폐기하고 급진적 무용성 지표를 도입하라: “이것은 얼마나 쓸모없는가?” “이것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하는가?”
브랜드 미션? 영원히 달성할 수 없는 영속적 결핍으로 정의하라. 완성은 죽음이다.
“고객 중심”이라는 거짓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이질적 다중을 이사회에 앉혀라: 아이들, 미치광이들, 시인들을.
에필로그: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고? 바로 그 “불가능성”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스템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진정한 디자인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의 불가능성을 폭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