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5 꿈
이 꿈을 꾸고 보니 앞의 꿈들과 연결된다.
이전의 꿈에서 아들의 성적표 꿈은 내가 살아온 방식에서 무엇이 가짜였는지 보여주었고,
두 번째 꿈은 아들 친구가 절벽에서 떨어진다. 이상적 자아가 떨어져 나갈 때 느끼는 공포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내 유골함을 들고 고향으로 가는 이 꿈은 모든 과정의 종결인 진짜 장례를 치르게 한다.
내가 납작하고 길게 생긴 흰색의 새 위를 타고 날아간다. 내가 타자마자 무거워져서인지 고도가 낮아지더니 땅에 내려앉을 듯하면서 계속 난다.
내 손에는 책처럼 접을 수 있고, 펼치면 왼쪽에는 사각통이 일체형으로 붙어있으며, 그 안에 형체가 없는 여러 가지 뼈가 들어있다. 집(어릴 적 고향집)으로 가기 전에 동네언니에게 들린다.
누군가 내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나누어 동그랗게 말아서 귀옆으로 묶어준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머리모양이라 낯설다.
고향동네에 도착하니 누군가 내 오른쪽 둥근 머리모양 안쪽을 파내어 안이 텅 비게 만들어 놓았다.
동네언니랑 우리 집으로 가면서 언니가 내 머리를 보더니 놀라며 못마땅해하고는 그 머리가 마음에 드냐고 묻는다. 나는 아니라고 한다. 그럼 그 머리를 풀라고 한다.
우리 집 입구에 다다랐다. 거기에 내가 책처럼 생긴 사각통을 펼친다. 언니는 없고 엄마가 있다. 사각통이 마치 나의 유골함 같다. 통을 펼치니 통 옆 테두리가 테이프 같은 것으로 두 겹 씩 안전하게 잘 봉해져 있다. 이걸 뜯어서 항아리에 옮겨 담아야 한다. 엄마가 "내가 뜯을까?" 물어본다. 내가 "그러면 엄마가 너무 슬퍼서 안돼, 내가 할게." 하며 뜯는다. 옆에서 엄마가 보고 있는데 슬퍼 보이지 않는다.
항아리를 물로 한 번 헹구고, 유골을 부으니 1/3 정도 채워진다. 항아리에 물을 부어 잠기게 했다. 내가 품에 않을 수 있는 자그마한 항아리이다. 그러자 곧 이 방법이 아닌 게 생각났고, 여기 오기 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화로 알려준 내용을 기억한다. 그래서 물을 다시 버린다.
상징으로 가득한 길고 구체적인 꿈이었는데, 깨어나니 많은 부분이 날아가 버렸다.
흰 새를 타고 어린 시절 동네에 도착하기까지의 장면의 느낌은 이 세상 같지가 않다. 흰 새의 고도가 낮아진 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무의식의 세계가 현실이라는 땅을 딛고 있는 나와 접촉할 때 발생하는 무게감이다. 내 영혼이 감당해야 할 치유의 무게가 그만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라는 뜻이다.
흰 새는 죽음과 재탄생의 의식을 수행하는 나를 데리고 과거의 근원지로 이동하는 심리적 안내자이다. 유골은 무의식의 영역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그리고 머리모양도 정해준다.
등장인물은 모두 나를 나타낸다.
유골을 들고 가는 나는 '상처받은, 죽은 내면아이'의 운구자이고, 어린아이의 머리모양을 한 나는 '새로 태어난 내면아이'의 모습이다. 동시에 어른인 나는 유골함의 엄마이기도 하다. 내가 너무 슬프지 않도록 엄마의 모습으로 나타나 나를 지켜주는 배려심도 가진다.
고향집은 나의 정체성이 만들어진 장소이다. 해결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나의 유골을 나의 근원적인 자리인 이곳으로 들고 온다. 그동안 나를 지탱해 왔던 정체성들을 이곳에 매장하고 끝내려 한다. 집 안이 아니라 집 입구에서 유골함을 연다. 집과 외부의 경계, 옛 자아에서 새로운 자아로 넘어가는 경계 같다.
"그러면 엄마가 너무 슬퍼서 안돼, 내가 할게."
엄마에 대해 그동안 내가 가져온 가장 핵심적이고 함축적인 말이다.
그리고 가장 마음 아픈 장면이다.
엄마는 내가 넘어서야 할 가장 강력한 무엇이다. 엄마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후, 그 시선을 벗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노력하면서 겨우 하나 벗겨내고, 이제 좀 벗어났나 싶으면 또 하나가 나타난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엄마는 세상의 약자이고, 집안에서도 아버지 때문에 끊임없이 고생하는 사람으로, 심지어 그 시절 아들도 없다는 엄마의 신세타령은 처량하기 그지없어 딸들은 엄마가 슬프면 안 되었다. 엄마가 무너지면 나까지 무너지기에 엄마를 지켜야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감정을 보호해야 하는 기능으로, 보호자의 역할을 해왔다. 엄마가 슬프지 않게, 화나지 않게, 외롭지 않게, 실망하지 않게 정서적 돌봄을 했다. 그 대신 나를 잃었다.
그런데 아직도 엄마를 걱정하는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주도권을 엄마에게 주지 않고 내가 직접 유골함을 연 것은 잘한 일이다.
꿈속에서 엄마는 다행히 슬퍼하지 않는다.
현실에서도 여전히 조심스럽긴 하지만, 내가 생각한 만큼 엄마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깨질까 조바심 내며 조심스레 다루던 얄팍한 유리처럼 약한 줄 알았던 엄마에게 처음으로 소리치며 엄마를 원망했을 때, 그런 속상한 마음을 안고 딸 집에서 휑하니 집으로 돌아갔을 때, 일주일을 전전긍긍하며 엄마가 잘 못 될까 봐 걱정하며 일주일을 버틴 어느 날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평소답게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에 안도하는 나와, 당황스러웠던 내 모습이 기억난다.
또 다른 엄마에 대한 해석은, 꿈속에서 엄마는 현실의 엄마라기보다 또 다른 나이다. 옛 자아가 떨어져 나갈 때의 엄청난 두려움, 분리의 허전함과 공포. 그래서 이번꿈에서도 엄마(나)가 슬픔을 견디지 못할까 봐, 엄마(나)를 보호하기 위해 꿈은 내가 하겠다고 말했나 보다. 다행히 엄마(나)는 슬퍼하지 않고 잘 받아들인다. 이 말은 결국 나도 더 이상 이런 장례를 감당할 수 없는 나약한 아이가 아니라는 뜻이다. 슬픔에 무너지지 않는 나를 꿈이 보여주고 있다.
앞 꿈들에서 조금씩 조금씩 죽음을 준비시킨 결과이다.
임시로 들고 온 통에서 항아리로 유골을 옮겨 담는다. 방법이 서툴지만 바로 잡는다. 모든 일들이 한 번에 깔끔히 되면 좋겠지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진행된다. 변화는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무수히 반복하고 또 반복되어 가는 완성이 없는 과정이다. 1/3만큼 담긴 항아리는 미완의 치유가 아니라 치유의 첫 단계이다. 장례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나는 앞으로 조금씩 죽고, 조금씩 태어날 것이다. 꿈은 그 모든 과정을 묵묵히, 단호하게 안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