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눈을 만나 뛰어나오고 / 홍재숙

by 홍재숙


"눈에 파묻힌 우리 집이 바라보였다. 두 개의 방을 허리띠처럼 두르고 있는 툇마루는, 비탈진 산구릉의 경사각을 따라 비스듬하게 덮인 눈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부엌문과 방문 두 개는 아랫부분이 눈 속에 묻힌 채였지만 뚜렷하게 분별할 수 있었다. 지붕 뒤쪽으로, 지붕마루높이보다 훨씬 길게 뽑아 올린 굴뚝이 하얀 털모자를 뒤집어쓴 채 새록새록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김주영 장편소설 <홍어> 수록, 문어당刊



어느 해 연이틀 전남 화순 산골짜기에서 질리도록 눈을 맞은 적이 있다. 남도 땅에 발을 디딜 때부터 성긴 눈발이 비실비실 와서 마음을 즐겁게 하더니 낯선 방에서 새우등을 꾸부리고 자던 그 밤에, 밤새도록 눈이 내리고 또 내렸다. 새벽에 커튼을 여니 세상이 온통 하얀색으로 변해있었다. 마을도 산도 나무들도 눈 이불을 뒤집어쓰고 쌔근쌔근 잠이 든 동화 같은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폭설이 내린 날은 김주영의 소설 <홍어>의 한 장면이 책갈피에서 빠져나와 내 마음에 내려앉는다. 주방 창문 너머 베란다 난간에 한 뼘 높이로 쌓인 눈이 여명에 반짝일 때, 우리 집과 옆집 사이에 골목길이 사라져 수평을 이룰 때에도 “세상에… , 밤새 내린 눈이 툇마루를 덮었다.” 깜짝 놀라는 길안댁의 혼잣말 장면이 풍경과 함께 눈과 버무려져 펼쳐진다.

그날도 그랬다. 책 <홍어>가 나를 불렀다. 아침을 먹는데 목화송이처럼 탐스런 함박눈이 흐린 회색 바람과 섞여 창문을 두드렸다. 유혹에 이끌려 두터운 겉옷을 입고 목도리는 친친 동여매 눈만 내놓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하얀 길이 보시 시 웃으며 맨들거린다. 나는 미끄러질까 봐 사박거리는 길에게 온통 힘을 주며 걸었다. 때마침 산골짜기도 늦잠 자다 깨어났는지 우우하며 고운 눈보라를 흩뿌린다. 갑작스레 앞이 안 보이고 흐릿해졌다. 순식간에 중간계 같은 희뿌연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막내작은어머니가 꿈속에서 보았다는, 대감 모자를 쓰고 누우런 도포를 입은 준엄한 사자(使者)가 방울을 흔들며 골짜기에서 흐릿하게 걸어 나오는 것 같은 환각에도 빠졌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옆집에서 울음소리가 들리더라. 할머니가 돌아가셨대. 그래서 그런 꿈을 꾸었나 봐"

저승사자가 방울을 요란하게 흔들면서 골목길로 걸어 들어와 옆집으로 들어가더라는 막내작은할머니의 꿈은 무서움이 되어 내 의식 안에 내내 웅크리고 있었는데, 그날 폭설이 내리는 화순 산골짜기에서 허리를 펴고 걸어 나왔다.

인간계의 낮과 밤의 익숙한 세계가 사라지고 온통 뿌연 눈안개 세계가 장막을 펼쳤다. 하늘과 땅의 결계(結界)가 사라진 듯 텅 빈 공(空)의 세계가 흐릿하게 너울거린다. 공허가 가득 찼기에 현실이 사라진 남도 화순 산골짜기의 괴이쩍은 길에 서서 나는 낯섦에 나를 통째로 맡겼다.

자욱한 눈보라 속에서 두 팔을 벌리고 사라진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었다. 금방 수북하게 눈발이 쌓인다. 자연과의 교감이다. 그동안 일상의 굴레에 허덕이느라 시간의 꼬리를 잡고 좀머 씨처럼 쫓기며 살아내느라, 일탈을 꿈꾸는 의식과는 달리 들씌어진 책무(責務)를 다하느라 얼마나 굳은살이 겹겹이 배겼는지 나는 고개가 아프도록 눈을 감고 나를 맡겼다.

깊숙한 곳에 잠자고 있던 마음이 올라왔다. 생각이 여러 화두를 던지면서 꼬드길 때도 꿈쩍 않던 마음이 눈을 만나 뛰어나왔다. 바람의 등에 업혀 산골짜기 나무들에게 엉켜있다가 달려오는 눈에게 마음이 말을 건다. 얼굴에 명징하고 차가운 눈이 닿으면서 정신이 맑아졌다. 하늘의 조화를 우러르며 나는 검은 패딩옷이 허옇게 뒤덮이도록 눈을 맞고 또 맞았다. 굴레에서 해방된 마음이 눈밭을 뛰어다닌다.

저만치 보이는 산골짜기 사잇길에 희뿌연 눈꽃이 소용돌이친다. 숱한 사람들에게 밟혀서 길이 되었기에 서로 애타게 바라만 보았던 두 골짜기의 마음이 터져 나왔는지 울면서 서로에게 거센 눈바람을 보낸다. 순식간에 골짜기가 사라지고 산길이 붙어 버렸다. 두 산이 만나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춘다. 산이 안 보인다. 산골짜기가 옷을 여미고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날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해 한참을 서성거렸다. 비로소 소문난 길치인 나 자신을 자각했더니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얼굴에 쌓였다가 녹은 눈이 마치 울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눈물이 되어 떨어졌다. 눈 속에 갇혀 핸드폰을 손에 들었다.

산길에 서서 아침 냄새와 눈 냄새를 맡고 또 맡았던 시간이 아른거린다. 얼마만 인지, 도시의 냄새를 떠나서 순수의 냄새를 맡아본 것은. 얼마만 인지, 속물 같은 생각은 밀쳐지고 순한 마음이 살포시 고개를 내민 것은. 그래서 마음의 통증이 옅어졌던 것은.

"세상에..., 밤새 내린 눈이 툇마루를 덮었데이." 폭설이 내리면 <홍어>의 길안댁과 팔짱을 끼고 우우 울던 화순 산골짜기에 사라진 길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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