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교가 깨운 일본의 근대

유교를 지운 일본의 사상적 자해

by 김욱

1. 메이지유신의 진짜 동력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메이지 유신은 흔히 서양 문물의 적극적인 수용과 모방의 결과로 여겨진다. 이른바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열강의 반열에 오른다는 슬로건은 일본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근대를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릴 수 있었던 엔진 속에서 타오른 진짜 연료는 다름 아닌 동아시아의 오랜 지적 전통, ‘유교(儒敎)’였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 사회의 지적 풍토나 대중의 의식 속에서 유교적 사유의 깊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근대화의 심장이었던 유교는 어쩌다 일본에서 자취를 감춘 걸까?


2. 일본 지성사를 뒤바꾼 조선의 성리학


일본 유교가 본격적인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은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임진왜란이었다. 기나긴 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들어선 에도 막부는 수많은 봉건 영주(다이묘)들을 통제할 강력하고 새로운 이념이 절실했다. 이제는 칼이 아닌, 질서와 명분에 입각해 통치의 정당성을 확립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전환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다. 본래 불교 승려였던 그를 유학의 길로 이끈 결정적 계기는 정유재란 당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온 조선의 선비 강항(姜沆)과의 만남이었다. 강항은 억류된 처지임에도 선비의 지조를 잃지 않았고, 세이카에게 당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이었던 조선의 주자학(성리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강항이 보여준 깊은 학문적 소양과 인격에 감화된 세이카는 승복을 벗고 유학자로 거듭났다.


강항에서 시작된 조선 주자학의 맥은 세이카를 거쳐 그의 수제자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으로 이어졌다. 스승의 학문을 이어받은 라잔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최측근 브레인으로 발탁되어 막부의 지배 철학을 설계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는 성리학을 일본 고유의 무사 질서와 결합시켰다. 이를 통해 상하의 엄격한 명분과 절대적인 충(忠)을 핵심 가치로 하는 '에도 막부의 통치 규범'이 확립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볼 때, 일본 유교의 사상적 기저에는 단연코 조선의 성리학이 자리 잡고 있다.


3. 근대를 예비한 에도의 거대한 학습 사회


조선의 자극으로 촉발된 유교는 에도 시대 260여 년간 단순한 지식인들의 사상적 유행을 넘어 거대한 사회적 열풍으로 번져나갔다. 유교는 막부와 각 번의 통치 이념이 되었고, 나아가 국가적 교육 인프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막부 말기에 이르러 각 다이묘가 영지 내에 세운 관립 학교인 번교(藩校)는 전국적으로 200개가 넘었다. 사무라이의 자제들은 더 이상 칼싸움만을 익히지 않고, 번교에 모여 『사서삼경』을 비롯한 유교 경전을 강독하며 지배층으로서의 교양과 통치 철학을 학습했다.


이러한 지적 팽창은 지배층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일반 평민과 상인 계층 역시 전국 방방곡곡에 자생적으로 세워진 민간 서당인 ‘데라코야(寺子屋)’에서 『논어』와 『맹자』를 배웠다. 이 시기 막대한 양의 유교 서적이 목판본으로 출판되어 지식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막부 말기 평민들의 식자율은 당시 서구 선진국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훗날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으로 서양의 거대한 충격이 닥쳤을 때, 일본이 서양의 복잡한 과학 기술과 근대적 법제도를 그토록 빠르게 이식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에도 시대 내내 유교적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며 축적해 온 탄탄한 지적 인프라와 훈련된 두뇌들이 이미 일본 전역에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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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메이지 유신을 잉태한 유교적 결기


메이지 유신의 핵심 인물들 또한 이런 유교적 토양 위에서 길러졌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그 대표적 사례다. 그는 수많은 유교 경전 중에서도 특히 역성혁명을 긍정하는 『맹자』를 깊이 탐독했다. 요시다 쇼인은 유교의 엄격한 화이론과 명분론에 입각하여, 천황을 받들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부르짖었다. 동시에 지식과 행동이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는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부르짖으며 실천을 독려했다.


그가 고향 조슈번에 세운 사설 학당 쇼카손주쿠(松下村塾)는 다카스기 신사쿠, 이토 히로부미 등 훗날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정부의 심장부가 될 젊은 주역들을 길러낸 산실이었다. 이 제자들 중 두 명은 훗날 총리대신이 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메이지 제국의 핵심 관료와 군부 지도층으로 성장했다.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일본을 지켜낸 힘의 원천은 가장 동양적 사상인 유교적 결기였던 셈이다.


5. 천황제와 결합한 유교 윤리


이러한 유교의 짙은 그림자는 1890년 메이지 천황의 이름으로 발표된 ‘교육칙어(敎育勅語)’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근대 일본 제국의 모든 신민이 지켜야 할 절대적인 도덕 규범을 담은 이 문건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하며, 부부는 화합하고, 벗과는 신의를 지키며, 학문을 닦고 공공을 위해 헌신하라"고 가르친다. 내용만 놓고 보면 이는 그 자체로 『논어』와 『맹자』의 핵심 윤리를 압축해 놓은 유교 도덕의 요약본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이 칙어가 향하는 최종적인 목적지는 보편적인 인류애나 개인의 수양이 아니었다. 모든 도덕적 행위의 끝은 “황조황종(皇祖皇宗)의 유훈” 즉, 황실의 무궁한 번영과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으로 귀결되도록 설계되었다. 전통적인 유교 윤리가 천황 중심의 신도(神道)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것이다. 근대 천황제라는 전체주의적 국가 모델을 지탱하기 위해 유교의 도덕을 국가동원의 도구로 전용한 것이다. 이는 또한 초기 메이지 국가를 지탱한 뼈대가 다름 아닌 유교였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6. 국가 신도의 창안과 유교 지우기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 일본 사회에서 유교는 왜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일까? 이는 자연스러운 시대적 조류가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이고 의도적인 삭제의 결과였다. 메이지 정부의 수뇌부들은 서양 문명을 모방하여 아시아를 벗어난다는 '탈아입구'를 국가 최우선 과제로 추진했다. 동시에 급조된 근대 국가의 흩어진 민심을 강력하게 하나로 결속시킬 절대적인 정신적 구심점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고대의 신화를 끌어올려 천황을 살아있는 현인신(現人神)으로 모시는 ‘국가 신도(國家神道)’라는 전대미문의 이데올로기를 창안했다.


이러한 새로운 국교화 과정에서, 지극히 아시아적 색채가 강한 유교는 서구화의 걸림돌이자 구시대의 유물로 낙인찍혀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폄하되었다. 메이지 정부의 배타성은 유교에만 머물지 않았다. 인도에서 유래한 외래 종교라는 이유로 불교 역시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는 신도와 불교를 강제로 분리하는 '신불분리령(神仏分離令)'을 내렸고, 이로 인해 전국 곳곳에서 사찰을 불태우고 불상을 파괴하는 '폐불훼석(廃仏毀釈)'의 광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막심한 탄압 속에서도 불교는 끝내 살아남아 일본인의 일상에 남았다. 일본의 불교는 이미 천여 년의 세월 동안 토착 신앙인 신도와 완전히 결합하여 '신불습합(神仏習合)'이라는 뗄 수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찰의 산신각이 불교라는 큰 틀 안에 토속 신앙을 '포용'한 형태라면, 일본은 신사 안에 불당이 들어서고 사찰 안에 신이 상주하는 '신궁사(神宮寺)' 체제가 천 년 넘게 일상을 지배해 왔다. 부처가 일본의 신으로 나타났다는 '본지수적(本地垂迹)' 사상 아래 사찰과 신사는 이미 혈관처럼 얽힌 단일 유기체였기에, 이를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을 반으로 가르는 것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반면, 종교적 신비주의가 배제된 채 철저히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철학 체계였던 유교는 달랐다. 종교적 제단이나 대중적인 신앙 기반 없이 교육 제도와 국가 이념에 의존했던 유교는, 국가가 교육과 제도 밖으로 밀어내자 빠르게 영향력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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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스스로 꺼버린 메이지의 엔진


일본을 근대로 쏘아 올린 강력한 엔진은 결코 고대 신화나, 맹목적이고 투박한 사무라이의 칼자루 정신이 아니었다. 조선 유학의 강렬한 자극 속에서 제도화된 에도 시대의 주자학, 수많은 번교와 사숙이 길러낸 열정적인 학습 사회, 그리고 『맹자』의 역성혁명과 명분론으로 철저히 무장하여 낡은 시대를 부수고 일어난 막부 말기의 젊은 지식인 집단이 바로 그 엔진의 정체였다.


일본은 근대화의 일등 공신이었던 유교를 스스로의 손으로 거세해버렸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천황을 맹목적으로 받드는 ‘신도’라는 국가 종교를 강제로 주입했다. 수백 년간 축적해 온 폭넓고 깊이 있는 지적 전통을 계승하지 못하고 천황 숭배와 국가 총동원이라는 극도로 비좁고 맹목적인 도덕으로 축소해 버린 것이다. 수천 년간 동아시아 전역에서 수많은 천재들이 논쟁하며 쌓아 온 고도의 형이상학적 철학과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담아내기엔 신도의 그릇은 턱없이 작았다.


오늘날 현대 일본 사회가 고질적으로 겪고 있는 장기적인 정치적 무관심, 비판 의식의 부재, 사회적 퇴행, 그리고 특유의 역동성 상실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유교라는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철학의 전통을 스스로 도려낸 일본은 결국 자신들을 신도의 낮은 사상적 수준 속에 스스로 가두어 버린 것이다. 아시아를 호령하며 메이지의 영광을 이끌었던 그 뜨겁고 강력했던 지적 엔진을 제 손으로 꺼버린 것이다. 세계사에 이만한 사상적 자해가 또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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