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신을 버리지 못하는 기독교 문명

신이 죽은 자리에서 인간을 구출하라

by 김욱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단순한 무신론의 외침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 문명을 2천 년 가까이 지탱해온 초월적 보증 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문명사적 진단이었다. 신은 도덕의 근거였고, 진리의 최종 심급이었으며, 인간 존재의 의미를 보증하는 절대적 시선이었다. 그러므로 신의 죽음은 한 종교의 퇴장이 아니라, 서구적 세계 해석 전체의 붕괴를 뜻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서구 지성계는 신이 사라진 폐허 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했지만, 그 모색은 끝내 신의 그림자에서 충분히 벗어나지 못했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넘어설 존재로 초인을 제시했다. 초인은 무너진 가치를 애도하는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니체의 기획은 위험한 모호성을 남긴다. 신의 자리를 비워두지 못한 채, 인간에게 다시 입법자의 자리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초인은 신을 부정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신의 기능을 인간에게 이전한다. 신이 맡고 있던 최종 가치의 설정 권한이 인간에게 넘어오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사상은 훗날 전체주의적 정치 기획에 의해 왜곡되고 차용될 여지를 남겼다. 신의 죽음 이후에도 서구는 여전히 “누가 최종 가치를 세울 것인가”라는 질문 안에 갇혀 있었다.


카뮈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도 이 문제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카뮈는 침묵하는 우주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부조리를 말했고, 자살이나 종교적 도약이 아니라 반항을 통해 존엄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사르트르는 신이 없다면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본질도 없으므로, 인간은 자신의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이들은 분명 종교적 도피를 거부했고, 인간의 자유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은 여전히 존재론적 황야에 홀로 던져진 고아에 가깝다. 신이 사라진 뒤에도 질문의 형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누가 나를 정당화하는가.” “내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오는가.” 신은 사라졌지만, 신이 대답해주어야 한다고 믿었던 질문들은 여전히 인간을 붙들고 있었다.


사르트르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은 이 문제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신이 있던 세계에서 인간은 타인의 오해와 비난 앞에서도 “신만은 나의 진실을 아신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적 시선이 사라지자 인간은 수많은 불완전한 타인의 시선 앞에 노출된다. 타인은 나의 내면을 온전히 보지 못하고, 겉모습과 행위만으로 나를 판단한다. 나는 나 자신을 설명하려 하지만, 타인은 나를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 속에 가두려 한다.


사르트르에게 타인은 나를 주체에서 객체로 떨어뜨리는 존재다. 이것은 단순한 대인관계의 피로가 아니다. 그것은 신의 부재 이후,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을 절대적 자리를 잃은 서구 자아의 비명이다. 절대적 좌표를 상실한 인간에게 수많은 타인의 시선은 인정 투쟁의 굴레가 된다. 신의 시선이 사라진 자리에 타인의 시선이 몰려들고, 인간은 그 속에서 끊임없이 판단받고 규정된다.


이러한 신의 죽음은 소외와 나르시시즘이라는 두 병리로 이어졌다. 소외는 본래 신으로부터 멀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종교적 감각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존재의 근거가 신에게 있던 문명에서 신과의 단절은 곧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잃는 일이다. 반대로 나르시시즘은 그 상실된 신적 애착을 자기 자신에게 투사하는 방식이다. 신에게 바치던 숭배가 자아에게 되돌아오고, 인간은 스스로를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로 꾸미기 시작한다.


신을 잃은 인간은 한편으로는 버려졌다고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신이 되려 한다. 소외와 나르시시즘은 서로 반대되는 현상이 아니라, 같은 상처의 두 얼굴이다. 신이 사라진 자리에 인간은 공허를 느끼거나, 그 공허를 자기 숭배로 메우려 한다. 결국 신의 죽음 이후 서구 지성계의 실패는 신을 충분히 부정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신의 자리를 끝내 비워두지 못했다는 데 있다.


신은 사라졌지만 존재론적 운동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서구 철학은 계속해서 인간을 ‘절대적 의미를 잃은 존재’로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신 애착의 잔재다. 원래 신이 대답해주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우주의 침묵이 부조리가 된다. 원래 절대자가 나를 알아주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타인의 시선이 지옥이 된다. 신을 부정하면서도 신이 남긴 질문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동아시아, 특히 유교적 전통은 중요한 우회로를 제공한다. 애초에 인격신이 중심에 놓이지 않았던 동아시아의 유교, 불교, 도가적 세계에서는 신이 죽은 뒤 서구가 겪은 우주적 고뇌가 같은 방식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동아시아의 우주는 누군가의 말씀으로 창조된 세계라기보다, 사시사철 스스로 운행하는 자연이다. 인간은 그 자연 바깥에 던져진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그 질서 속에 포함된 존재다.


유교적 인간은 신 앞의 단독자가 아니라 관계 속의 존재다. 인간이라는 말 자체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뜻하듯, 나는 타인과 분리된 원자가 아니다. 나는 부모, 자식, 친구, 이웃,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이 세계에서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내가 인간이 되는 조건이다. 타인은 나를 파괴하는 외부자가 아니라, 나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관계의 일부다.


유교의 군자는 니체의 초인과 다르다. 초인이 고독하게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라면, 군자는 관계 속에서 자신을 닦고 타인을 헤아리며 인을 실현하는 존재다. 사르트르에게 타인의 시선은 나를 사물로 만드는 폭력일 수 있지만, 유교에서 타인의 존재는 나의 도덕적 성숙을 가능하게 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동아시아적 맥락에서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 그 자체다.


이 관점에서 진정한 지옥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부재다. 관계망이 끊어지고, 누구도 나를 부르지 않으며, 아무도 나의 존재에 응답하지 않는 상태야말로 동아시아적 세계에서는 더 깊은 고립이다. 서구의 실존적 고독이 신의 침묵에서 비롯된다면, 동아시아적 고독은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된다.


물론 동아시아적 관계론을 낭만화해서는 안 된다. 한국 사회의 눈치, 체면, 서열, 집단 압력은 실제로 개인을 억압할 수 있다. 타인은 언제나 천국이 아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타인이 가장 잔인한 감시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병리는 관계 자체의 실패이지, 관계론의 무효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의 과제는 타인의 시선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배와 평가의 시선에서 돌봄과 상호 완성의 시선으로 바꾸는 데 있다.


신이 죽었다면 신 대신 또 다른 절대자를 세우려 해서는 안 된다. 초인, 국가, 이념, 시장, 자아 숭배는 모두 신의 빈자리를 메우려는 미련일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신의 부재를 견디는 또 하나의 존재론이 아니라, 인간을 그 존재론적 감옥에서 건져내는 일이다.


서구가 신을 잃은 뒤에도 계속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면, 동아시아의 통찰은 시선을 옆으로 돌리라고 말한다. 답은 침묵하는 우주에 있지 않다. 함께 살아가는 인간 사이에 있다. 신이 죽은 이후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신적 개념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을 다시 인간 사이로 돌려보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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