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간음사건이 있었다. 박저생은 원래 파독이라는 여성을 첩으로 두었는데, 그의 아버지 박침이 중간에 파독과 간통했다. 아버지가 죽자 박저생이 다시 파독을 첩으로 삼았다. 신하들은 아버지의 여자를 간음한 아들 박저생과 첩 파독, 그리고 이 사실을 외부에 알려 남편의 죄를 드러낸 박저생의 아내 곽씨까지 모두 법에 따라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박저생의 아들이 아버지 박저생의 구명을 호소했다. 그러나 신하들은 "조부나 아버지의 첩을 간음한 자는 참수한다"는 법 조항을 들어 반대했다. 이들은 박저생의 죄가 사형에 해당한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이에 대해 태종은 다른 관점을 제시하며 제동을 걸었다. 태종은 파독이 원래 아들 박저생의 첩이었던 사실을 지적하며, 이 사건이 아비의 첩을 범한 일반적인 경우와 동일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죄가 의심스러울 때는 가벼운 쪽으로 처벌하라"는 법의 정신에 합당한지 신하들에게 되물었다.
태종의 "죄가 의심스러울 때는 가벼운 쪽으로 처벌하라"는 발언은 현대 형법의 대원칙인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원칙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는 범죄 사실의 증명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피고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근대적 법치주의의 핵심이다. 신하들이 법을 교조적으로 적용하려 한 반면, 태종은 사실관계의 미묘한 차이를 파고들어 법의 합리적 해석과 적용을 추구했던 것이다.
아래는 해당 내용이 실린 태종 12년 12월 11일 기사를 정리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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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이 태종에게 박저생이라는 인물의 사건을 상세히 보고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박저생에게는 '파독(波獨)'이라는 첩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 박침이 이 첩과 간통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가 죽자, 박저생은 파독을 다시 자신의 첩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를 공유한 패륜적인 행위임이 명백합니다. 또한 박저생의 아내인 곽씨는 이 부끄러운 집안일을 남들에게 떠벌려서 남편의 죄를 드러냈고, 첩인 파독은 아버지와 아들의 첩이 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니, 관련된 모든 이들을 법에 따라 엄히 처벌해 주십시오."
태종은 보고를 받고 각자의 형량을 한 등급씩 낮추어 판결했습니다. 박저생은 곤장 100대에 3천 리 밖으로 유배, 아내 곽씨는 곤장 90대에 2년 반 징역형, 첩 파독은 곤장 100대를 때리고 나머지 죄는 돈으로 대신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박저생의 아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북을 치며(격고) 아뢰었습니다. "제 아버지가 스스로 결백을 증명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나라에 여러 차례 큰 사면령이 있었으니 죄를 용서받을 만합니다."
이 문제를 논의한 의정부와 육조의 신하들은 사형을 주장하며 반대했습니다. "법전에 따르면 **'조상이나 아버지의 첩과 간통한 자는 참수형에 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륜을 무너뜨린 큰 죄를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태종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렇게 반박했습니다.
"그 여종(파독)은 원래 박저생의 첩이었는데, 그 아버지가 중간에 간통한 것이다. 아버지가 죽은 후 박저생이 다시 첩으로 삼은 것을, 처음부터 아버지의 첩을 범한 것과 똑같이 취급하여 사형에 처하는 것이 과연 **'죄가 의심스러울 때는 가벼운 쪽으로 판결하라'**는 법의 정신에 맞다고 할 수 있는가? 다시 논의하여 보고하라."
태종은 또 고위 관료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박저생의 죄가 죽어 마땅하다 하더라도, 본인의 자백도 없이 처벌하는 것이 꺼림칙하지 않은가?"
이에 형조 판서 김희선이 답했습니다. "사건의 증거가 명백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박저생 자신도 이 죄가 사형감인 줄 뻔히 아는데, 어찌 순순히 자백하겠습니까? 원칙대로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합니다."
한편, 박저생의 동생들이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호소하자, 신하들은 이들이 관청을 모욕했다며 가두어 버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신하들의 판단을 하나하나 바로잡으며 동생들을 풀어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내 곽씨의 본래 의도는 남편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붓아들에게 죄를 주려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동생들은 이전에는 판결이 확정되지 않았으니 가만히 있었겠지만, 이제 형이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형제로서 어찌 시시비비를 따진 후에야 변호하겠는가? 모두 풀어주어라."
그 후 박저생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첫 번째 탈옥: 감옥에서 탈옥하여 '박의'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재산 다툼을 벌이다 정체가 탄로났습니다. 그는 "전에 돈을 내고 죄를 사면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사헌부는 그를 엄벌할 것을 건의했고 태종도 이를 따랐습니다.
두 번째 탈옥: 또다시 탈옥했으나 마침 내려진 사면령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울주로 보내졌습니다.
세 번째 탈옥과 자살: 하지만 그는 거기서도 또 도망쳐 김화현에 숨어 살다가, 동네 사람과 밭 문제로 다투는 등 악행을 일삼았습니다. 결국 상대방의 아내가 그를 사헌부에 고발했고, 관리가 체포하러 오자 박저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