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 주택(야마모토 리켄, 나카 도시하루 저) 을 읽고 -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면 대부분 낯선 이웃과 만나게 된다. 가족이 아이와 함께 타거나 어린 학생이라면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짧은 인사말을 건네기가 수월하다. 하지만 남자 어른이거나 웃음은커녕 눈길도 주지 않는 이웃과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할 때면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라 더디게 올라가는 숫자만 노려보곤 한다. 이웃과 인사는 하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에 매번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누지만, 그 관계는 일회성일 뿐 더 이상의 유대를 기대하지도, 기대할 수도 없다.
아파트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이면서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거 형태다. 심지어 군 단위 지역에도 대단지 아파트가 들판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도 결혼을 한 후 수십 년을 아파트에 살면서 스스로를 자연과 이웃으로부터 단절시키고 우리 가족만을 위한 공간에 고립되어 생활하는 것에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껴 왔다.
아파트는 언제부터 어떻게 우리 삶의 방식을 지배하게 되었을까?
19세기 산업혁명으로 도시에 노동자가 대량 유입되었다. 주택은 부족해지고 노동자들은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런던의 노동자는 1평에 평균 3명이 거주했고 18시간의 긴 노동시간과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에 도시 노동자의 평균수명은 17세에 불과했다. 그러자 산업자본가들은 균일하고 안정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공간으로서 ‘노동자 주택’을 탄생시켰다. ‘노동자 주택’은 남성은 회사에서 일하고 여성은 집에서 가사를 돌본다는 분업 체제와 함께 자녀를 양육하는 데 적합한 환경으로 고안되었다. 성현상(性現像)을 위한 부부의 침실과 자녀의 방, 식사하기 위한 다이닝 키친 등으로 구성되며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가족의 프라이버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노동자에게 주택은 타인의 간섭을 받지 않고 가족과 함께 평온하게 지내면서 자손을 남기는 장소이며 공급자로선 모든 노동자에게 똑같은 주택을 공급하는 방식을 통해 가족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흩어져 있지 않는 균일한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고, 이는 균일한 제품의 생산과 그대로 연결된다. (인용: 탈 주택, 야마모토 리켄 외)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을 위한 대규모 공동주택이 만들어졌다. 1952년 프랑스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현대 아파트의 효시라고 불리는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설계했다. 지금의 아파트와 유사하게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12층짜리 공동주택이었다. 유럽의 건축 기술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우리나라의 최초 아파트는 일본 기업인을 위한 관사로 지은 3층짜리 ‘미쿠니아파트’다.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인 ‘마포아파트’를 시작으로 우후죽순 아파트촌이 들어섰고, 이제 우리나라 전 세대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에 산다.
산업화 시대 도시 서민들의 주택난을 해소하기 위해 만든 표준화된 공동주택, 1가구 1주택이라는 주택 형식은 주택 내부에 틀어박혀 주변에 사는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내부의 행복(프라이버시)만을 추구하도록 설계되었다. 사람들의 생활도 아파트에 맞춰 변하기 시작했고 대다수 국민의 삶의 모습이자 문화가 되었다.
‘행복의 건축’에서 ‘알랭 드 보통’은 ‘장소가 달라지면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사람도 달라진다. 환경은 늘 우리의 생각과 감정, 신체 반응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친다.’라고 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라는 광고카피처럼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혐오하고 배제하는 사회, ‘빌거(빌라에 사는 거지), ’휴거(휴먼시아 주공아파트에 사는 거지)‘라는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세상이 되었다.
아파트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탈 주택‘에서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 노인의 고독사와 뒤늦은 발견, 주택 안에서 발생하는 강간, 살인, 아동학대 등 사건 사고는 주택이 너무 밀실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커뮤니티라는 인간관계를 파괴해 온 다양한 원인 중 핵심은 1가구 1주택이라는 주거 형식이다. 고도성장기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주택은 이제 그 역할을 다했다. 자녀 양육이건 간병이건 가족만으로는 생활을 영위하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국가행정은 이를 보완하는 데 필요한 사회보장비를 감당하지 못한다. 1가구 1주택이라는 형식이 무너지면 무슨 일이 발생할까. 어떤 사회학자는 모든 인간이 ’외톨이‘가 된다고 말했다. 건축은 개인의 일생보다 더 긴 시간 동안 그곳에 존재한다. 지금 주택을 설계하고 만드는 행위는 이 주택에 살게 될 미래 주민을 생각하는 일이다. 가족의 규모는 작아졌고 1인 가구가 주류를 이룬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가족이 담당했던 역할 즉, 육아, 간병, 방범 등은 이웃이나 지역이 대신해야 한다. (인용: 탈 주택, 야마모토 리켄 외)
아파트에서 커뮤니티가 가능한가?
수많은 건축가가 1가구 1주택을 만드는 한편으로 그런 주택을 모아 어떻게 하면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하는 모순된 행위를 해왔다. 모두가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커뮤니티라고 대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근대 주택 계획에 누락된 것은 경제다. 주택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경제활동에도 참여한다는 구조를 갖추지 않는 한 커뮤니티는 성립될 수 없다. 그런 것도 모르고 주택지를 무리하게 경제권으로부터 분리시켰기 때문에 근대 도시계획은 당연히 실패할 수밖에 없다. 산업혁명 이전, 임금노동자라는 새로운 생활양식 종사자가 다수파를 차지하기 이전의 주거 형식은 대부분 지역 경제와 하나를 이루는 것이었다. (인용: 탈 주택, 야마모토 리켄 외)
이 책의 저자이자,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야마모토 리켄’은 ‘커뮤니티는 가능하다. 이웃하여 함께 살아간다는 그리고 그것이 쾌적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주택은 얼마든지 계획할 수 있다.’고 답한다. 그는 주택의 집합을 하나의 커뮤니티로 만들기 위해 그 집합의 '지역사회권화’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실제로 그가 설계한 '판교의 타운하우스'와 '강남의 세곡동 아파트'는 그의 생각을 실현한 작품들이다. 각 세대의 현관은 투명유리로 둘러싸인 ’시키‘라는 주택에 포함된 공적 공간을 통해서 사적 공간으로 들어간다. 각 세대는 '시키'를 통해 주민들이 교류할 수 있는 공용 데크로 연결된다. '시키'는 주인의 취향에 따라 취미활동을 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전시를 하거나 법적으로 허가만 된다면 물건을 만들고 판매하는 작은 경제 공간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르코르뷔지에‘가 상상한 아파트의 모습도 이와 비슷했다. 그가 설계한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단순한 주택의 집합체가 아닌 인간의 삶의 방식을 담아내는 도시의 축소판, 마을 같은 공간이었다. 건물 내부에는 상점, 공용 공간, 여가 시설을 포함하여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면서도 공공성을 유지할 수 있는 주거방식이었던 것이다.
가족의 프라이버시와 주변의 커뮤니티는 상호 모순된다. 하지만 급속한 현대화로 가족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우리 모두 외톨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프라이버시와 커뮤니티가 양립하는 주거 공간으로의 변화는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