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리지 않는다는 건, 아직 문제의 본질에 닿지 못했다는 뜻이다
끌리지 않는다는 건, 아직 문제의 본질에 닿지 못했다는 뜻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끌리지 않을때는 결국 어딘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내가되고싶은 것과 지금의 차이, 이는 프로젝트에도 있지만
의사결정권자에게도 있다.
즉 의사결정권자가 생각하는 프로젝트의 본질, 이 프로젝트를 생각할 때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부합해야한다.
소위말해 키맨이 품고 있는 문제를 풀어야한다.
기획을 하다 보면 종종 이런 순간이 온다.
클라이언트는 “이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팀은 “가능하다”고 답한다.
제안서엔 “전략”이 있고, 일정표엔 “로드맵”이 있다.
그런데 마음이 안 움직인다.
그럴 때 나는 질문을 바꾼다.
“내가 이걸 이해 못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아직 ‘무엇을 해결하는지’를 정확히 못 잡은 건 아닐까?”
끌림은 감성의 문제가 아니다.
‘왜’와 ‘무엇’을 같은 방향으로 맞췄을 때 생기는 정렬감이다.
내가 끌리지 않을 때, 그 감정의 정체를 따라가 보면 항상 같은 구조가 나온다.
**내가 되고 싶은 상태(Desired State)**와
지금의 상태(Current State) 사이의 간극.
이 간극은 프로젝트에도 존재하고, 내 삶에도 존재한다.
프로젝트에서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결과: “브랜드가 선택되는 이유를 강화한다”
지금의 현실: “지표는 나오는데, 팬이 남지 않는다”
혹은,
우리가 달성하고 싶은 목표: “신규 유입을 늘린다”
지금의 현실: “유입은 늘었는데, 전환이 안 된다”
문제는 언제나 “차이”에서 시작한다.
끌리지 않는다는 건, 그 차이를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프로젝트를 잘 설명”하려고만 한다. 정작 중요한 건 이거다.
의사결정권자가 이 프로젝트를 떠올릴 때, 무엇이 가장 아픈가?
그들이 달성하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
그 목표를 가로막는 ‘진짜 장애물’은 무엇인가?
이 질문을 놓치면, 아무리 전략이 멋져도 끌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건 그들의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해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기획을 이렇게 정의하게 됐다.
기획은 정답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키맨이 품고 있는 문제를 정확히 꺼내어 이름 붙이는 일이다.
키맨은 종종 “마케팅”을 말하면서도
사실은 다른 문제를 품고 있다.
“이번 분기 실적을 방어해야 한다”
“내부에서 이 프로젝트의 정당성을 증명해야 한다”
“상위 보고를 통과할 수 있는 논리가 필요하다”
“리스크를 최소화한 선택을 하고 싶다”
“조직의 불신을 깨고 싶다”
겉으로는 ‘캠페인’이지만, 속으로는 ‘정치’일 때도 있고
겉으로는 ‘브랜딩’이지만, 속으로는 ‘살아남기’일 때도 있다.
그래서 종종 기획자는 이런 일을 한다.
‘프로젝트의 문제’가 아니라 ‘키맨의 문제’를 풀어주는 방식으로
프로젝트의 문제를 해결한다.
이게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기획의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끌리지 않을 때마다 아래 3가지를 다시 묻는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무엇이 달라져야 하지?
(성과가 아니라 ‘상태 변화’로 말해보기)
키맨이 진짜 두려워하는 실패는 뭐지?
(예산 낭비? 조직의 체면? 다음 분기? 경쟁사 대비? 리스크?)
키맨이 의사결정을 할 때 쓰는 언어는 뭐지?
(브랜드 언어인가, 숫자인가, 리스크인가, 사례인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끌리지 않는 순간은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그건 오히려 좋은 신호다.
아직 문제의 본질이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는 신호.
아직 키맨의 진짜 문제에 닿지 못했다는 신호.
그러니 나는 그 감정을 무시하지 않으려 한다.
끌리지 않는다는 건,
아직 우리가 ‘무엇을 풀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못 만났다는 뜻이니까.
물론 키맨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기 힘든 경우가 많다.
조직은 늘 “합리적인 척” 움직이지만, 실제 의사결정은 생각보다 은밀하고, 감정적이고, 맥락적이다.
그래서 나는 이걸 전제로 깔고 시작한다.
키맨을 ‘찾아내는’ 게 아니라, ‘드러나게 만드는’ 구조를 만든다.
사람을 맞히는 게임이 아니라, 질문으로 판을 바꾸는 일이다.
가장 흔한 함정은 “키맨 = 직급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현실에선 키맨이 분산되어 있다.
예산을 쥔 사람
리스크를 책임지는 사람
최종 사인을 하는 사람
실제 운영을 끌고 가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싫다/좋다”를 감으로 결정하는 사람
이 중 하나라도 놓치면 프로젝트는 이상하게 삐끗한다.
그래서 나는 키맨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 프로젝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 운명은 대개 세 갈래 중 하나로 갈린다.
돈(예산)
권한(승인)
부담(리스크)
키맨을 못 찾겠다면, 최소한 ‘돈/권한/부담’이 어디에 앉아 있는지부터 찾으면 된다.
솔직히 누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완벽히 알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을 읽기” 대신 “판단 기준을 수집”한다.
키맨의 생각은 안 보이지만, 키맨이 좋아하는 것에는 흔적이 남는다.
지난번에 통과된 안의 구조
자주 쓰는 단어(“안전하게”, “이번 분기”, “전략적으로”, “레퍼런스”)
싫어했던 것(“너무 실험적”, “우리랑 안 맞아”, “리스크”)
회의에서 반복되는 질문(“해본 적 있어요?”, “얼마예요?”, “누가 책임져요?”)
이 흔적들을 모으면 한 가지가 보인다.
키맨이 세상을 보는 ‘렌즈’
즉, 그 사람의 평가 함수다.
회의에서 키맨을 찾는 가장 빠른 방법은,
“멋진 아이디어”를 던지는 게 아니라
결정이 필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들.
“이번 프로젝트에서 절대 실패하면 안 되는 한 가지는 뭐예요?”
“성공을 숫자로만 보면 뭘로 볼까요? 그리고 숫자 말고는요?”
“이번 건에서 가장 민감한 이해관계자는 누구예요?”
“이 결정을 누가 최종 책임지나요? (혹은 보고 라인이 어떻게 되나요?)”
“리스크를 줄이려면 무엇을 고정하고, 무엇을 실험해도 되나요?”
이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몰리거나,
누군가 말을 멈추고 “그건…” 하고 뜸을 들인다.
그때 보인다.
아, 저 사람이 결정의 목을 쥐고 있구나.
키맨은 명함에 적혀 있는 게 아니라,
침묵의 무게로 나타난다.
키맨이 불명확할수록, 우리는 더 위험해진다.
왜냐하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프로젝트는
모두가 “좋다”고 말하다가, 마지막에 “안전한 선택”으로 후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럴 때는 ‘정답 제시’가 아니라
선택지를 설계해야 한다.
나는 보통 3단 구성으로 만든다.
A안: 안전한 안(확실히 통과되는 안)
B안: 성과 지향 안(ROI/전환/효율 중심)
C안: 브랜드 지향 안(이미지/스토리/장기 자산 중심)
그리고 각 안마다 반드시 붙인다.
기대 효과(뭘 얻는지)
포기하는 것(뭘 잃는지)
리스크(어디서 터질지)
통제 장치(어떻게 막을지)
이렇게 하면 키맨이 누구든 간에
결정이 “취향”이 아니라 “구조”가 된다.
그리고 구조로 결정되는 순간,
키맨은 결국 얼굴을 내민다.
“그럼 우리는 B로 가죠.” 혹은 “C는 리스크가 커요.” 같은 말로.
결국 마지막은 번역이다.
내가 본질이라고 믿는 것과
키맨이 본질이라고 느끼는 것 사이의 거리를
언어로 줄이는 작업.
키맨이 숫자의 사람이라면: “이건 전환 구조를 바꿉니다.”
리스크의 사람이라면: “이건 실패 확률을 통제합니다.”
조직의 사람이라면: “이건 내부 설득이 쉬워집니다.”
브랜딩의 사람이라면: “이건 장기 자산이 됩니다.”
똑같은 전략도, 언어가 다르면 전혀 다른 프로젝트가 된다
내가 끌리지 않을 때는 보통 둘 중 하나다.
프로젝트의 문제를 아직 덜 풀었다.
키맨의 문제를 아직 못 만났다.
그리고 이 둘은 따로가 아니다.
대부분은 겹쳐 있다.
키맨이 품은 문제를 만나면
프로젝트는 갑자기 “명확해지고”,
그 순간 이상하게도 내 마음도 같이 움직인다.
끌림은 감정이 아니라,
본질이 맞아떨어졌다는 징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