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나는 한 팀원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제목은 제법 단호했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회의 시간에 툴툴거리고,
기분이 상하면 표정부터 먼저 달라지고,
일의 맥락보다 감정이 앞서는 순간이 잦던 그 팀원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친구는 조금 길들여야겠다고.
아니, 정확히는 회사라는 세계의 언어를 익히게 해야겠다고.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그래서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일이라는 건 결국 목적과 맥락 위에서 굴러간다는 걸
나는 알려주고 싶었다.
조금 더 넓게 보게 하고 싶었고,
조금 더 단단해지길 바랐다.
그런데 ,그 팀원이 말했다.
디자인팀으로 가고 싶다고.
원래 디자이너였던 사람이다.
본인 말로도 정체성에 혼돈이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운함보다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이건 반항이 아니라 귀향이구나.
솔직히 말하면, 아주 놀랍지는 않았다.
사람은 싫어하면 티가 난다.
생각보다 빨리 난다.
말보다 먼저 표정에서,
표정보다 먼저 말투에서,
그리고 회의실의 미묘한 공기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은 모를 수가 없다.
그래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조금 서운했고,
조금 민망했고,
조금 미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구나 싶었다.
사실 나는 요즘 자주 생각한다.
내가 좀 잘못했나.
내가 너무 내 방식으로만 보려고 했나.
그 사람이 원래 서 있어야 할 자리를 무시한 채,
지금 이 자리에서 버티게 하려 했나.
리더가 되면 자꾸 착각한다.
내가 누군가를 이끌 수 있다고.
조금 더 가르치면 바뀔 거라고.
조금 더 설득하면 적응할 거라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덜 배워서 힘든 게 아니라,
원래 있어야 할 자리가 따로 있어서 힘든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그 팀원을 길들이려 했지만,
돌이켜보면 사실 길들이기보다는
정렬시키려 했던 것에 더 가까웠다.
내가 이해하는 일의 방식에,
내가 중요하다고 믿는 순서에,
내가 편하다고 느끼는 협업의 언어에.
물론 팀이 굴러가려면 공통 문법은 필요하다.
그게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다만 이제는 안다.
사람은 시스템 부품이 아니라서,
정렬이 곧 성장인 것은 아니라는 걸.
누군가에게 그 과정은 훈련이 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신이 흐려지는 경험이 된다.
그 팀원이 “정체성에 혼돈이 있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회사에서는 이런 말을 종종 가볍게 넘긴다.
다들 하기 싫은 일도 하면서 배우고,
원래 잘하던 일이 아니어도 버티며 적응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떤 혼돈은 단순한 적응기의 통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계속 어긋나게 쓰고 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나는 그 신호를 얼마나 진지하게 들었을까.
혹시 “조금만 더 해보자”는 말로
그 사람의 마음을 계속 늦추고 있었던 건 아닐까.
예전엔 좋은 리더가
사람을 잘 데리고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끝까지 붙잡고,
결국은 익숙하게 만들고,
성과를 내게 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요즘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좋은 리더는 어쩌면
사람을 반드시 내 방식으로 바꾸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디에 있어야 덜 망가지고
더 자기다워지는지를 알아차리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잘 키우는 것과 잘 보내주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없다.
둘 다 결국
상대를 내 소유물처럼 보지 않는 데서 시작하니까.
물론 아직도 아주 쿨하게 생각되진 않는다.
“그래도 내가 그렇게까지 못해줬나?” 싶은
찌질하고 인간적인 마음도 조금은 남아 있다.
리더의 자리는 원래 좀 민망하다.
사람을 잘 이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상대가 조용히 말한다.
“저는 원래 저쪽 사람이에요.”
그러면 그동안의 피드백과 설득과 코칭이
순식간에 이렇게 번역되는 기분이 든다.
수고하셨습니다만, 직무 매칭은 실패하셨습니다.
이 문장은 웃기지만,
생각보다 아프다.
나는 사람을 키우고 있었나,
아니면 내가 편한 방향으로 정렬하고 있었나.
리더십은 누군가를 끝내 붙잡는 기술이 아니라,
그 사람이 바뀌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알아보는 감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 후편의 진짜 제목은
어쩌면 이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실패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