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 길들이기

내 팀원이 선을 넘는 사람이라면?

by Way Maker

이직을 하면 보통 두 가지를 먼저 본다.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그리고 대표가 어떤 사람인지.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면 진짜 회사를 결정하는 건 다른 데 있었다.


바로 이미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내 밑으로 배정된 팀원 하나가 있었다.

문제는 그가 일을 못한다는 데만 있지 않았다.

일을 못하는 사람은 가르칠 수 있다.

문제는 일의 기본을 스스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그래서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지금 이 업무가 어디로 연결되는지.

이런 건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한 번쯤 머릿속에서 굴려봐야 하는 질문들이다.

그런데 그 친구에게 일은 대체로 그런 구조가 아니었다.
그의 일은 “예전에도 했으니까”, “그냥 이렇게 하면 되니까”, “아무튼 시키는 것 같으니까”의

세계에 가까웠다.
생각보다 꽤 많은 회사가 이런 방식으로 굴러간다.
문제는, 그렇게 굴러가던 회사가 어느 날 갑자기 ‘정리할 사람’을 앉혀놓는 순간 생긴다.


그때부터 오래된 습관은 자존심이 되고,
질서 없는 방식은 자기만의 영역이 되며, 기준을 세우려는 사람은 불청객이 된다.

그 친구는 딱 그런 상태였다.

나름 혼자 골목대장처럼 일해왔던 모양이다.
혼자 익숙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아무도 정확한 기준을 묻지 않고,
대충 돌아가기만 하면 문제가 되지 않던 자리.


그런데 내가 왔다.
그리고 나는, 안타깝게도,
“왜?”를 묻는 사람이었다.

왜 이걸 해야 하죠.
그래서 결과물은 뭔가요.
누가 보고, 어떤 판단을 하게 되나요.
지금 이 방식이 맞다고 생각한 근거는 뭔가요.

이 질문들은 내게는 일을 위한 기본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자리를 흔드는 침범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 그 친구는 꽤 성실하게 나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회의 시간에는 반말이 툭툭 섞여 나왔다.
기분이 상하면 표정으로 바로 티가 났다.
조금만 방향을 수정하면 억울하다는 얼굴을 했다.
가끔은 툴툴대는 말 속에, 이 팀의 리더가 누구인지 슬쩍 흐려놓으려는 기색도 묻어났다.


처음엔 당황했다.
그다음엔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솔직히 화가 났다.


회의 자리에서 내 팀원이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 순간이라는 건 꽤 묘하다.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든다.
누가 보면 사소한 말투 하나, 짧은 툴툴거림 하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조직 안에서는 그런 작은 것들이 묘하게 크다.
말 한마디가 역할을 흔들고,
표정 하나가 질서를 흐리고,
툭 던진 태도 하나가 “아, 이 팀은 지금 리더십이 안 섰구나” 하는 인상을 만든다.

그럴 때 사람은 아주 나쁜 유혹을 느낀다.
“한 번 세게 눌러버릴까?”

사실 그게 제일 쉽다.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고,
차갑게 잘라 말하고,
실수한 걸 크게 드러내고,
‘누가 위인지’ 알아듣게 만들면 된다.


회사에는 이런 방식을 너무 자연스럽게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단호하다”고 부른다.
하지만 내가 겪어본 많은 경우, 그건 단호함이라기보다 상처 주는 방식에 익숙한 사람의 습관에 가까웠다.

나도 그런 사람들을 겪어봤다.
사람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자존심을 깎고,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불안을 전가하고,
일을 바로잡는 대신 사람부터 눌러버리는 방식.

그 밑에서 버티던 시간 동안 내가 배운 건 업무보다도 이상한 감각들이었다.
말투를 먼저 눈치 보는 법,
기분 나쁜 침묵의 의미를 해석하는 법,
혼나는 것보다 무시당하는 게 더 사람을 작아지게 만든다는 사실 같은 것들.

그래서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내가 상처받았다고 해서,
다음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갚아주는 어른은 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그냥 좋게좋게 넘어갈 수도 없다는 데 있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기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다르다.

친절한 리더와 만만한 리더도 다르다.

이걸 머리로는 아는데,

막상 현실에서는 경계가 자꾸 흐려진다. 강하게 말하면 내가 싫어했던 어른 같고,
좋게 말하면 우습게 보일 것 같고, 참자니 질서가 무너지고,
터뜨리자니 관계가 망가질 것 같다.


리더십은 대개 멋진 단어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이런 지질하고 소모적인 고민의 연속이다.


"누군가는 방향을 못 잡고,
누군가는 감정을 못 숨기고,
누군가는 자꾸 선을 넘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누군가는 생각한다.
나는 어디까지 참아야 하고, 어디서부터 끊어야 하지.


원래 그런 환경에서 일했을 수도 있다.
아무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자기 방식이 틀렸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자존심 상할 수도 있다.
새로 온 사람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해와 방치는 다르다.

누군가의 결핍을 이해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그 결핍이 팀 전체의 기준을 무너뜨리게 두는 건 다른 문제다.

특히 회사에서는 더 그렇다.
한 사람의 미성숙은 종종 모두의 피로가 된다.
한 사람의 태도 문제는 회의 분위기를 해치고,
보고 체계를 흐리고, 결국 “이 팀은 왜 이렇게 어수선하지?”라는 평가로 돌아온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 친구를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 팀에서 일할 때 필요한 기준이 무엇인지 명확히 세우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런 것이다.

회의 중 반말하지 않기.
기분이 상해도 공개적으로 태도로 흔들지 않기.
업무를 받으면 먼저 왜 하는지, 결과물이 뭔지 정리하기.
동의하지 않더라도 툴툴대는 방식 대신 질문하는 방식 쓰기.
실무적 미숙함은 괜찮지만, 협업의 기본은 지키기.

이런 건 사실 대단한 리더십도 아니다.
초등한 질서에 가깝다.

그런데 조직이 무너지는 건 늘 거창한 전략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이 초등한 질서가 사라졌을 때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조금 바꿨다.
그 친구를 ‘길들여야 할 말광량이’로 보기보다, 오래 방치되어 제멋대로 커버린 습관의 집합으로 보기로 했다.
사람을 미워하면 감정이 먼저 움직인다. 하지만 문제를 구조로 보면, 적어도 덜 잔인해질 수 있다.


어쩌면 이건 내가 어떤 어른이 될 것인지에 대한 시험일지 모른다.


리더십은 사람을 누르는 기술이 아니라,
선을 그으면서도 사람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연습이니

그리고 그 연습은 늘 진행 중이다.


어쩌면 회사라는 곳은
성과를 만드는 곳이기 전에,
각자 안에 숨어 있는 유치함과 오만함과 상처를
어설프게 들고 와서 부딪히는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오늘도 나는 생각한다.
한 번 세게 누르는 대신,
한 번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고.

좋은 사람이 되자는 건 아니다.
그럴 여유도 없다.

다만
내가 싫어했던 방식 말고,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기준을 세우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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