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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범 Nov 27. 2022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한 줌의 시간

놀라운 상상력과 개성으로 '한 줌의 시간'을 말하다.


본 글은 영화의 결말까지 포함한 영화 해석, 리뷰입니다. 스포일러에 주의해 주세요.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름다움? 교훈? 메시지? 여러 가지 답변이 나올 수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개성'이다. 그 작품만이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 개성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설득시키면 좋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정말 미친 상상력을 바탕으로 놀라운 개성을 장착한 영화이다. '다중우주'라는 소재를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상상도 못할 영화 언어로 구현했다.




'에블린(양자경 분)'은 남편 '웨이먼드(조나단 키 쿠안 분)'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와 힘겹게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딸 '조이(스테파니 수 분)'는 자신의 여자친구를 데리고 오며 말썽을 피우고 웨이먼드는 이혼 청구서를 가져온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상황에 에블린은 세탁소에 관한 세금을 처리하기 위해 국세청에 가야 한다. 여러 가지 일이 에블린에게 한꺼번에 덮친 이 순간, 웨이먼드는 갑자기 '다중우주(멀티버스)'를 설명하며 이 세계에 거대한 악이 닥쳐오고 있다고 전한다. 이해하지 못한 에블린에게 이상한 일이 닥쳐오기 시작하고 그녀는 다중우주라는 놀라운 세상을 마주한다.




거울에 비친 즐거운 가족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일단 상상력이 굉장히 놀라운 영화다. 카메라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며 시작하는 첫 장면처럼 이 영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다중우주(멀티버스)'라는 소재는 마블 유니버스를 통해 소개되면서 대중에게 인식되었는데 이 영화는 차용하는 걸 넘어서 적극적으로 응용하며 한 번도 보지 못한 세계를 창조한다. 또한 영상이 화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뛰어난 상상력과 표현력, 유머까지 결합하여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화면비를 바꾸면서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는데, 슈퍼히어로 영화와 무협영화, SF영화를 변주하며 기발한 액션을 창조한다.(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화양연화>, <혹성 탈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생각난다.) 특히 에블린과 엉덩이에 트로피를 꽂은 두 명의 부하들이 싸우는 장면은 선명하게 기억이 날 정도로 인상적이다.(그 두 명의 부하는 영화의 무술감독이라고 한다.) 영화감독은 그렇다 치더라도 영화 제작사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제작사가 예술성이 짙고 독창적인 영화를 만드는 A24인 점과 제작자 중에 마블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루소 형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문득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가장 훌륭한 점은 놀라운 상상력과 표현력을 이야기에 탁월하게 적용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니깐 이 영화의 신비로운 화법은 이야기에 굉장히 적합하다. 이 영화는 2가지 관점으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우선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성장 영화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에블린은 가족에게 불만이 많은 사람이다. 우유부단한 남편이 원망스럽고 레즈비언인 것을 아버지에게 밝히려는 딸이 밉다. 나름 사랑하지만 딸에게 살이 쪘다며 "더 건강하게 좀 먹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중우주의 에블린을 보며 더욱 커진다. 웨이먼드와 결혼하여 자신은 가난에 찌들고 비참해졌지만, 결혼하지 않고 화려한 배우가 된 또 다른 에블린을 본 그 심정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결국 이것은 그 우주를 탐내려고 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무엇이든 못하니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최악의 에블린은 우주의 악당 '조부 투바키'를 상대하기 위해 또 다른 다중우주의 에블린을 만나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쿵후 무술을 배우기도 하고, 요리 칼질을 하면서, 엄청난 폐활량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을 통해 급격한 정보가 들어오면서 정신이 분열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그 끝에서 조부 투바키, 즉 딸 조이의 마음을 이해한다. 에블린은 가족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자신이 가족에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잘하는 거 하나 없고, 실패만 했기에 볼 수 있는 가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현 상황에 불만을 가졌다. 결국 다중우주를 경험한다는 것은 남편의 소중함을 깨닫는 일이고, 분열된 딸의 정신과 교감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순간 에블린은 딸에게 '네 감정을 알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고백한다.

에블린은 남편이 지나치게 착하게 산다고 생각했지만 그것 또한 그가 살아가기 위한 전략임을 알았고, 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그제야 에블린은 딸의 정신으로 대변되는 조부 투바키의 이름을 틀리지 않는다.) 가족을 자신이 생각한 소유물이 아닌 그 자체로 인정한 순간 그들과 같은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에블린이 마지막으로 싸울 때 이마에 장난감 눈알이 하나 더 붙는데, 이것은 에블린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가난하지만 세탁소를 운영하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엉망인 삶도 괜찮다고 인정한다. 그렇게 싸우는 법을 배워나간 에블린은 조부 투바키와 마지막 결투에서 싸우는 자세가 아닌 안아주는 자세를 만든다. 결국 싸우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안아주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다.




영화감독 다니엘스 듀오는 멀티버스는 인터넷에 대해 웃기게 비유한 것이라고 밝혔다. 조부 투바키는 인터넷과 SNS를 통해 분열된 딸 조이의 정신 상태이며 부모님과의 세대 차이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에블린이 다중우주를 열심히 탐험하는 행위도 인터넷을 열심히 돌아보며 자녀 세대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넓은 인터넷 세상을 탐험한 끝에 알아낸 진리는 결국 새로운 우주를 탐내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소중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자신 앞에 있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며, 손을 건네고, 친절을 베푸는 것이 혼란스러운 세상과 싸우는 방법이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측면은 '허무주의'이다. 조부 투바키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올라간 베이글을 만들며 '전부 다 부질없다'라는 진실을 깨달았다고 밝힌다. 그리고 모든 것은 다 부질없기에 괴로움과 죄책감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넓디넓은 우주에서 하나의 먼지 같은 존재이다. 이 세상은 모순과 혼란으로 가득하다. 우릴 하찮은 쓰레기로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수만 가지가 존재한다. 가운데가 뻥 뚫린 베이글 모양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인간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안은 텅 빈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돌이 인생을 진리를 말하는 장면은 흡사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 인간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상식이 통하는 한 줌의 시간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에블린이 빗속에서 웨이먼드와 이야기하는 순간일 수도, 동료 요리사와 함께 라따구리를 구하는 순간일 수도, 손가락이 소시지라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치는 순간일 수도, 데굴거리는 돌과 함께 떨어지는 순간일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 존재를 관계 속에서 증명하는 순간이 삶에서 끊임없이 틈입한다.




사실 에블린은 가족이 없다면 뭐든 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우주에 사는 걸까. 가난하고 비참하고 불만족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가족이고 관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을 만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우주가 충돌하는 것이고, 그렇게 새로운 것이 생겨난다. 역설적으로 모든 것이 다 부질없기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1부 '모든 것', 2부 '모든 곳', 3부 '한꺼번에'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에블린 '모든 것'이 되는 과정을, 2부는 다중우주의 '모든 곳'을 가는 과정을, 3부는 그 수많은 것을 '한꺼번에' 정리한다. 3부에서 에블린과 웨이먼드는 키스를 나눈다. 이것은 1부에서 노부부가 나누었던 키스가 반복되는 것이며 세월이 흘러도 그들은 서로를 믿는다는 키스를 반복할 것을 의미한다. 영화 3부 마지막에 국세청에 앉아 있는 에블린에게 수많은 소음이 쏟아진다. 하지만 국세청 직원이 질문을 건네는 순간 소음은 사라진다. 결국 우리 세상에 존재하는 모순과 혼란의 소음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타인을 향한 질문과 관심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벗어나 무엇이든(Everything) 될 수 있고, 어디든(Everywhere)을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이 세상의 수많은 것들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토록 복잡한 세상과의 관계를 한꺼번에(All at once) 정리할 수 없다. 결국 모순과 혼란이 가득한 이 세상과 싸우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눈앞에 보이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따듯한 포옹을 건네는 것이다. 가장 소중한 '한 줌의 시간'은 늘 우리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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